Search Results for '경영 일기/김영삼'


92 posts related to '경영 일기/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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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1/05/22 프로그래머의 아내가 알아두어야할 97가지
  3. 2011/05/01 사람찾기방법 - 이름으로 사람찾기, 전화번호로 사람찾기, 친구찾기 26
  4. 2011/05/01 쌍둥이 출산 용품
  5. 2011/03/04 식사는 하셨습니까?
  6. 2010/10/01 왜 너 부터입니까? 나 부터지요
  7. 2010/09/24 자판기 동전 교환의 비밀 2
  8. 2010/08/16 (주)오픈코리아 1기 인턴사원 모집 5개 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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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5 02:58 2011/09/05 02:58
재미난 글...
  1. 딱 떨어지는 숫자는 2진수입니다.
  2. 한 손으로 31까지 셀 수 있음
  3. 만능이 아님
  4. "컴퓨터"를 잘 하는게 아님
  5. 프로그래머라고 Office 시리즈에 정통한 것이 아님
  6. 아, 그 작업은 사무쪽 누님이 잘하실 겁니다.
  7. 가나 입력으로 변환한 다음에는 반드시 로마자 입력으로 돌려놓을 것
  8. 프로그램의 쓰레기 수집은 잘 하지만 자기 방의 쓰레기 수집은 잘 못함
  9. 멀티스레드 처리 작성은 할 수 있지만 멀티스레드 처리는 못함
  10. Amazon 에서 사는 건 기술서이므로, 딱히 포장물 내용을 확인할 필요는 없음
  11. 쌓아놓은 책은 스택이므로 순번을 바꾸지 말것
  12. 오라일리 책은 「같은 책」이 아님
  13. 표지에 동물만 그려져 있는 책만 꽂혀있어도 그건 동물도감이 아님
  14. 프로그래밍을 안하는 날도 있음
  15. 프로그래밍 언어나 에디터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다면 깨달음을 얻었거나 완전연소했거나 둘 중 하나
  16. 언어로 바람피우는 것과 인생의 바람피우기는 다른 것
  17. 「자식을 죽인다」는 말에 놀라지 말 것
  18. 일 관계로 전화를 할 때, 자식이 죽지 않으면 부모를 죽여버리라는 대화를 들어도 놀라지 말것
  19. 라이브러리라는 것은 도서관을 말하는 게 아님
  20. 「사이드 이펙트(부작용)」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님
  21. 특히 「다이아몬드 상속」은 유산상속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님
  22. 괜히 보석 이름 같은 것을 중얼거려도 보석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아님
  23. 루비와 펄 중에 뭐가 좋아? 라고 물어보면, 싱긋 웃으면서 펄이라고 대답할 것
  24. 「조금만 더하면」「거의 끝났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당분간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
  25. 갑자기 혼잣말을 하기 시작해도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아님
  26. PC 를 보고 있는 남편에게 말을 걸어도 되는 타이밍인지 아닌지 외견으로 판단하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좋음
  27. 23-24시 정도가 가장 활발함
  28. HP 는 항상 0에 수렴함
  29. 회사와 집의 구별이 그다지 없고, PC 앞에 있는가 없는가의 구별 밖에 없음
  30. 스스로가 정보수집과 오락의 경계선을 이해하지 못함
  31. 몬스터헌터는 업무
  32. 애니메이션 보는 것은 업무
  33.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인터넷을 하는 것 뿐임
  34. 주말에도 스터디에 간다고 하는 것은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증거, 가사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님
  35. 한밤에 긴급전화가 왔다면, 다음날부터의 예정은 캔슬이라고 생각합시다
  36. 밤중에 갑자기 사라져도 그냥 장애 대응하러 간 것임
  37. 오전중에 돌아오는 일이 많아져도 바람피우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 말것
  38. 주말에만 사복으로 「출근」했다고 바람피우는 것이라고 의심하지 말 것
  39. 결혼식장에서 신랑이 사라져도 당황하지 말것. 고객이 호출한 것 뿐임
  40. 정시퇴근은 도시전설
  41. 「귀가한다」「귀가할 수 있다」라는 말은 별 도움이 안됨
  42. 10일 정도 돌아오지 않아도 당황하지 말 것
  43. 감금같은 걸 당해도 빚이 있어서 그러거나 한 게 아님
  44. 가끔씩 일찍 돌아와도 잘렸을 걱정은 하지 말 것
  45. 여름 휴가 언제야? 라고 묻지 말 것
  46. Twitter 의 post 빈도 감소나 내용에서 상대가 얼마나 바쁜지 추측해서 위로할 것
  47. 화재나 행진같은 것에 트라우마를 갖고 있을 것
  48. 남편 급여의 직능급과 기본급과 잔업수당의 비율
  49. 노동기준법
  50. OA 기기라고 적힌 우편물은 절대로 OA 기기가 아님
  51. PC 나 휴대폰, iphone 에 패스워드 락이 걸려있는 것은 보안대책을 위해서. 바람을 핀다거나 야한 것을 숨기고 있는게 아니랍니다( ^ω^)
  52. 컴퓨터는 이미 집에 있잖아, 라고 하지 마시길. 당신이 갖고 있는 구두나 가방과 같은 것입니다.
  53. 한밤중에 컴퓨터로 동영상을 보면서 싱글거리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Apple 의 신제품 발표이므로 신용카드를 몰수하는 것이 좋음
  54. 스티브 잡스의 프리젠테이션이 있는 다음날 아침에 갑자기 개최되는 가족회의에서 제출하는 안건에 대하여 「다른 집은 다른 집이고 우리 집은 우리 집이야!」라고 기각할 것
  55. 뭐가 뭔지 알수 없는 T 셔츠를 남편이 계속 가져와도 적당히 버리거나 하지 말 것
  56. 컴퓨터 책상에 놓여있는 피겨나 프라모델은 버리지 말 것
  57. 그것은 잡동사니도 부서진 물건도 아님
  58. 키넥트를 사려고 하는 것은 유저 인터페이스 연구 때문에
  59. 러브 플러스를 하는 것은 유저 인터페이스 연구 때문에
  60. 사용자 경험(UX)인지 뭔지 하는 주제에 CUI 를 좋아함
  61. LCD 가 달려있는 작고 비슷하게 생긴 기계를 잔뜩 갖고 있어도 전부 다른 물건이며 각자 의미가 있습니다
  62. 동작검증을 하기 위해서는 신제품이 필요하며, 그것은 Amazon 에서 배달됨
  63. 옥션 사용방법을 숙지하고, 남편이 사온 장난감을 팔아치워 용돈으로 씁시다
  64. 생일 선물은 원하는 물건을 미리 말해두지 않으면 신제품 디지털 가전(Gadjet)을 받게 됨
  65. 깜짝 선물을 준비하고 싶다면 남편의 Amazon 위시 리스트를 조사함
  66. iPhone 앱, Android 앱, Web 사이트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뭐가 뭔지 몰라도 상냥하게 대답해줄 것
  67. 쓸데없이 하이텐션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일 때에는 단순히 흥미 깊은 기술이 나와서 텐션이 높아진 것 뿐이므로, "잘 모르겠지만, 대단하다는 건 알겠다"라고 대답해주세요
  68. 갑자기 이상한 어휘가 늘었다면 니코니코 동화같은 데애서 유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하시길
  69. 남편의 HN 과 본명을 이어보려고 해서는 안됨
    남편의 블로그의 과거로그를 음독해서는 안됨
    남편의 HN 으로 검색해서 흑역사를 알아서는 안됨
  70. 「우리 마누라가…」라고 했을 때, 그것은 프로그래머 사이에서 통용되는 전문용어입니다. 당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71. 오타쿠라고 하면 필요 이상으로 싫어하지만, 긱(Geek)이라고 말하면 기뻐합니다
  72. 침울해하고 있을 때는 「컴퓨터를 조작해서 ○○할 때 마우스를 쓰지 않고 키보드만으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해?」라고 물으면 기뻐하면서 가르쳐 줄 것입니다
  73. 「시뮬레이션」이라고 말하면 혼나므로 주의할 것
  74. 이상, 이하, 미만, 보다 위, 보다 아래를 대충 섞어쓰면 기분이 나빠짐
  75. 프로그래머는 「절대로」「뭔가 이상해졌어」「아무것도 안했어」같은 말에 과잉으로 반응합니다. 홧병, 쇼크사, 자살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이런 말을 사용할 때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76. 부부싸움할 때 최대의 무기는 화이트 보드
  77. 어쩌다 아내의 방식에 불만을 표시하면 「그건 사양(仕様)이예요」라고 대답함
  78. 남편이 이건 사양이라고 말하면 그 사양은 변경되었습니다 라고 대답할 것
  79. 싸워서 꼭지가 돌아버렸을 때에는, 네트워크 회선을 끊어버리는 것이 가장 손쉽고 효과적으로 분노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80. 가능하면 아내와의 대화를 자동화시키고 싶어 함
  81. 아내에게는 사양 변경이 붙는 법
  82. 홈 서버를 가리키면서 쓰지도 않는데 왜 항상 전원이 켜져 있는 거야 라고 묻지 말 것
  83. 연락수단은 전화<<<<<(넘을 수 없는 벽)<<<<메일<<<<<<<IRC, Skype, etc
  84. Google Calender 에서 상대의 스터디 스케쥴을 파악할 것
  85. 집안 예정은 남편이 지정한 그룹웨어로 공유할 것. 구두(口頭)로의 통지만으로는 위험
  86. 남편이 해야할 것은 데스마치(죽음의 행진)이 아닌 여유가 있을 때 기억시켜두지 않으면 답이 없음
  87. 가정 내의 중요한 스케쥴을 끼워넣고 싶을 때에는 마감 근처의 주말은 피합시다. 어차피 집에 못 돌아옵니다
  88. 남편이 전문분야인 화제에는 신중하게 접근할 것
  89. 친구 관계의 잡담을 할 때에는 상관관계도를 그려주면 이해가 빨라집니다
  90. 단순히 이야기를 들어주기 바랄 때에서는 그렇게 명시할 것
  91. 동의해주기 바랄 때에 분석되어 정론을 들어도 화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92. 요건은 항목별로 적어서 전하지 않으면 프로그래머 스스로가 버그를 냄
  93. 밤생활이 불만이면 Redbull 을 내밀어봄
  94. 정기적으로 자식들에게 이게 아빠야 하면서 사진을 보여주세요
  95. 남편이 「프로그래머의 아내가 알아야 할 97가지」같은 걸 트윗해도 신경쓰지 말 것
  96. 읽어보라고 한 97가지의 절반 이상이 뭔 소리인지 몰라도 어쩔 수 없음
  97.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내를 사랑함. 하지만「쪽팔려서 말 못해」라고 생각해서 말로 표현하지 않을뿐.
원문은 여기
2011/05/22 08:16 2011/05/22 08:16

사람찾기방법 - 이름으로 사람찾기, 전화번호로 사람찾기, 친구찾기

사람찾기방법은 해결사만 하는것이 아닙니다. 온라인에서는 사람을 찾는 여러사이트들이 있습니다. 과거 아이러브스쿨이 유행했었던 적이 있는데 동창찾기를 포함한 사람찾기 사이트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온라인에서 사람을 찾는 서비스는 상태가 온라인서비스에 가입되어야만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찾기 사이트 - 사람찾기방법
1. 네이트 사람검색
- 싸이월드 db를기반으로 사람이름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싸이월드 이용자가 공개를 하지 않았을 경우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싸이열풍으로 대부분의 사람찾기가 가능했으나 현재는 공개를 하지 않거나 싸이이용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서 검색결과가 예전만 못한것으로 보입니다.
링크 : http://search.nate.com/search/ps.html?z=PS&s=&tq=&sc=&afc=&thr=ta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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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트 - 사람검색



2. 다음 사람찾기
- 싸이월드, 아이러브스쿨의 유행으로 다음에서도 사람찾기 서비스가 있었으나 현재는 서비스가 종료되어 제공되고 있지 않습니다.


3. 네임검색
- 사람찾기 서비스의 핵심은 결국 사람입니다. 중소규모의 회사에서 아주 특별한 마케팅이나 기술이 없다면 해당 서비스를 진행하기 힘듭니다. 네임검색역시 등록된 사람의 연락처를 알려주는 서비스인데 등록된 db가 많지 않습니다. 링크 : http://www.name.co.kr/
2011/05/01 03:37 2011/05/01 03:37
2011/05/01 01:41 2011/05/01 01:41

식사는 하셨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자주 건네는 인사말 중 하나이지요.
'밥은 먹고 다니냐?'는
어르신들의 물음 속에 담긴
넉넉한 애정이 새삼
떠오르곤 합니다.
무심하게 건네는 말 같지만,
사실은 진심과 관심이
있어야 건넬 수 있는 인사겠지요.

모쪼록 끼니 잘 챙기시며,
늘 편안한 날 되십시오!

2011/03/04 16:57 2011/03/04 16:57

**♣자신을 들여다보는 삶♣**
 "자신을 알려거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유심히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거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까닭입니다.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그것이 왜

나쁜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으로 자신에게 유익함을 주게 됩니다.
 
먼지가 없는 깨끗한 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환하게 보여주지만
 
먼지가 가득 낀 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희뿌옇게 보여주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자신 또한 상대방의 거울인 까닭에 경거망동을 삼가고 바른 몸과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자신을 살피고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보다 더 아름답고 평안한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살피고 들여다보는 것으로 해서 자신의 옳고 그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서 바로 잡아야 하고
 
어긋난 것이 있으면 제 위치로 돌려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반듯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 이렇듯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니까 상반된 논리와 주장에 부딪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야 모두가 받아 드리지 않을까요?
좀더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것은 나로부터 시작이 돼야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매일 너부터 시작하라고 하기 때문에 시끄러운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평안함과 좋은 날들이 되세요.

2010/10/01 01:22 2010/10/01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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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알게된 지식인데, 자판기에 2000원을 넣고 반환 레버를 돌리면 1000원짜리 하나, 500원짜리 하나 100원짜리 5개가 나온다는 것이다.
한번 시험 해봤더니 어느 자판기에서나 매우 잘 동작해서, 동전이 필요 할 때마다 요긴하게 잘 써먹고 있다.
오늘도 그 방법을 써먹으려다가 문득 왜 이렇게 친절하게 동전을 교환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마지막 천원짜리 한장만 반환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3000원을 넣고서 반환 레버를 돌려봤다.
이런 젠장.
1000원 짜리 한개. 500원 짜리 한개. 100원 짜리 10개. 50원짜리 10개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내 저금통에 50원 짜리가 잔뜩 자리 잡아버렸다.
4000원을 넣으면 어떻게되냐고?
10원짜리가 잔뜩 튀져 나올까봐 해보기가 무섭다.
한번씩들 해보시죠.
2010/09/24 01:06 2010/09/24 01:06

[보안뉴스 길민권] 인터넷 비즈니스 솔루션 전문업체 (주)오픈코리아 (대표 김영삼)가  1기 인턴사원 을 모집한다고 15일 밝혔다.


모집부문은 프로그램 개발, 시스템 엔지니어, 웹 디자이너, 웹기획·서비스기획·마케팅, 재무회계 등 총 5개 분야로 4년제 대졸 이상 학력을 가진 2010년 2월 기졸업자 및 8월 졸업 예정자면 지원이 가능하다.


지원자들은 오는 9월20일까지 (주)오픈코리아 인턴 채용 페이지(www.openkr.com/)를 통해 지원하면 된다.


전형은 1차 서류심사와 인적성검사, 2차 면접으로 구성되며 1차 서류전형 합격자는 오는 22일 홈페이지 게시 및 개별 통보를 통해 발표될 예정이다.


선발된 인턴사원은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간 각 직무별 실무자와 1:1 멘토링을 통해 해당 실무를 경험하게 된다. 또 팀 별로 주어지는 프로젝트도 참여할 수 있다.


특히 오픈코리아는 인턴십 기간 중 다양한 평가를 통해 업무에 적합한 인재라고 판단되면 프로그램 종료 후 바로 취업할 수 있는 특전을 제공할 예정이다.


(주)오픈코리아 이일규 이사는 "인턴십은 다양한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입사 지원 시 혜택도 부여되는 장점이 있어 취업 준비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번 (주)오픈코리아 인턴 프로그램이 취업 준비생들에게 성공적인 사회로의 첫발을 내딛는데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길민권 기자(reporte21@boannews.com)]

2010/08/16 16:16 2010/08/16 16:16
당신을 좋게 말하지 말라.
그러면 당신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또 당신을 나쁘게 말하지 말라.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말한 그대로 취급받을 것이다.

-루소-
2010/08/08 17:58 2010/08/08 17:58
모든 성공의 방법은 실천입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당장 실천해야 하며 실천하는 목표를 마인드스토밍을 통하여 만들수 있다.

마인드스토밍이란 브라이언 트레이시가 만들어 낸것으로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실천방안을 종이에 적은 이후에 하나하나 바로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

이영상은 46분 짜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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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4 12:43 2010/08/04 12:43

[최신판]전국낚시터안내 지도 전국각지 자세한설명!  전국낚시터안내 지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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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3 17:22 2010/06/03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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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3 08:37 2010/04/13 08:37





 


2010/04/13 06:37 2010/04/13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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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9 00:48 2010/03/29 00:48
출처 :
네이버 - http://new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ws&sm=tab_jum&query=%uC624%uD508%uCF54%uB9AC%uC544%20%uAE40%uC601%uC0BC

다    음 - http://search.daum.net/search?w=news&q=%EC%98%A4%ED%94%88%EC%BD%94%EB%A6%AC%EC%95%84%20%EA%B9%80%EC%98%81%EC%82%BC&enc=utf8&nil_search=btn

'국내 최고' 넘어 세계시장 목표
[향토기업을 찾아서] ⑫ (주)오픈코리아
2010년 03월 15일 (월) 오창균 기자 crack007@suwon.com

지난 2008년 리먼사태로 촉발된 경제침체 이후 좀처럼 국내 경기가 활력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수원지역도 마찬가지다. 기업과 시민이 힘을 합쳐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에 본지는 지역경제를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수원의 향토기업’을 응원하기 위해 연속 기획시리즈를 마련했다. 오늘은 열두 번째 순서로 기술 집중형 IT기업 ‘오픈코리아’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인터넷 홈페이지, 아티보드를 사용하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 손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 김영삼 오픈코리아 대표가 아티보드를 설명하고 있다. ⓒ 오창균 기자 crack007@suwon.com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거나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아티보드’. www.webarty.com에 접속해 아티보드 솔루션을 내려 받으면 초보자일지라도 인터넷 홈페이지를 한방에 구축할 수 있다.

특히 모든 기능을 포함한 프로그램을 무료로 배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인기는 하늘을 높은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무료로 배포한다고 하지만 ▲빠른 속도 ▲강력한 관리자 모듈 ▲지속적 업데이트 ▲다양한 부가기능·스킨 제공 등으로 인해 최강의 웹사이트 구축 솔루션이라는 평가다.

‘행정중심복합도시디자인·세종시’ 홈페이지를 비롯해 ‘광교신도시 공원디자인공모’, ‘국토지리학회’ 등 관공서는 물론이고 대기업 웹사이트까지 아티보드를 이용해 제작된 홈페이지는 무수히 많다.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아티보드의 장점은 다양하지만 최고 장점이라 하면 바로 빠른 실행속도를 꼽을 수 있다. 자체 개발한 ‘웹 해킹 방지 보안시스템’을 탑재했지만, 복잡한 SQL을 단순화 시키고, 적절한 절차를 기본적으로 수행하기 때문에 빠른 성능을 자랑한다. 

아티보드를 개발·공급하고 있는 오픈코리아(대표 김영삼·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549-10 아석빌딩 3층)는 웹사이트와 인터넷 쇼핑몰, 보안솔루션, 커뮤니티 등 온라인상의 모든 솔루션을 기획·개발하고 있다. 

지난 8년 동안 축적한 기술과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으며, 연 매출의 60%를 매년 R&D에 투자하는 등 국내 정상을 목표로 질주하고 있다.

김영삼 오픈코리아 대표는 “웹 에이전시, e비즈니스, 네트워크시스템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쌓인 노하우를 바탕으로 유기적인 환경을 설계·구축함으로써 앞으로 어떠한 컨텐츠 개발에 있어서도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김 대표의 이력은 참 독특하다. 국내에서 알아주는 해킹 커뮤니티인 해커스쿨을 처음 만든이가 바로 김 대표다. 이 후 실력을 인정받아 삼성SDS에서 근무하던 그는 2년만에 돌연 사직서를 제출하고 오픈코리아를 설립한다.

김 대표는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주위사람 모두가 미쳤다고 퇴사를 만류했지만 나만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싶다는 꿈을 져버릴 수 없어 과감히 사직서를 던졌다”고 설명했다. 
 
2002년 설립 당시 연 1억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빠듯했지만 현재는 연 80억 이상 매출고를 달성하며 불과 6~7년만에 수원 최고의 IT중소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김 대표는 “앞으로 국내 최고의 솔루션을 개발하고, 나아가 세계 시장을 목표로 하는 기업으로 오픈코리아를 성장시키고 싶다”며 포부를 밝히고 “윈도에서 제공하거나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방화벽을 사용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해킹을 할 수 있으니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고 보안 솔루션 전문가로서 당부했다.


출처 : http://news.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ws&sm=tab_jum&query=%uC624%uD508%uCF54%uB9AC%uC544%20%uAE40%uC601%uC0BC

2010/03/14 23:55 2010/03/14 23:55

고흥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녹동항은 규모는 작지만 고흥 지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과거 녹동항은 남해연안 어업 전진기지로 수산물이 풍부해 풍요로움을 누렸다. 여기에 더해 녹동항에서 600m 떨어진 '작지만 아름다운 섬' 소록도는 고흥의 대표적 관광지로 일반인의 발길이 이어져 녹동항 주변 상권 활성화를 가져왔다.

녹동항과 지척인 소록도는 섬 전체가 한센병 환자를 위한 병원지역으로 지정돼 과거엔 외부인들의 출입이 통제됐다. 그러나 1988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면서 아름다운 풍광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관광객은 녹동항을 통해 소록도를 찾게 됐다.

항구 바로 앞에 눈에 잡힐 듯 떠있는 소록도와 사시사철 풍부한 어패류가 생산된 녹동항이 고흥을 대표하는 '금싸라기 땅'이 된 이유다.

어획고가 꾸준히 늘면서 수산물 가공공장을 비롯한 어망 등 어구 판매점, 얼음공장 등 연관업체가 연이어 들어섰다. 소록도 관광객을 겨냥한 음식점, 숙박업소도 호황을 누렸다.

항구 주변 상권이 활기를 띠면서 인구도 꾸준히 늘었다. 녹동항이 포함된 고흥군 도양읍의 인구 수가 군청 등 행정기관이 밀집된 고흥읍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녹동항은 그러나 여느 항ㆍ포구와 마찬가지로 1980년대 이후 어획량이 급감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곳에서 주로 잡히는 대표 어종은 광어, 우럭, 돔, 낙지, 갯장어 등이었지만 먼 바다의 싹쓸이 조업 및 어선 감척사업 등의 여파로 최고의 활황을 누렸던 때와 비교할 땐 어획고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최근 고흥군 수협 위판액은 2007년 540억원에서 지난해 610억원으로 늘었다. 그러나 이는 활어 등의 어획고 증가가 아닌 물김 작황이 좋았기 때문이다.

고흥군 수협 관계자는 "꾸준한 감소세를 보이던 위판액이 최근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며 "가장 큰 원인은 양식 규모가 확대되면서 패류 생산이 늘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어획량이 들쭉날쭉한 고기만 잡아선 생계유지가 힘들다고 판단한 어민들이 양식장에 눈을 돌리면서 소득 창출에 나섰고,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외지인들의 소록도 방문 증가에 따른 관광 수입은 어패류 위판과 함께 녹동항 경제력을 지탱하는 한 축이다. 소록도에는 70세 이상인 주민 620여 명과 의료진 180여 명이 살고 있다. 하지만 소록도에는 관광객이 머물고 쉴 수 있는 시설이 전무한 상태. 녹동항이 소록도의 배후 관광단지 역할을 맡게 된 이유다.

특히 지난 3월 도양읍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총 연장 3460m의 소록대교 개통으로 접근성이 크게 향상되면서 섬 주민들의 바깥 나들이가 원활해졌고, 관광객이 늘면서 항구 활성화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그러나 이같은 외적인 변화가 녹동항 주변 상권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진 않았다. 소록대교 개통으로 자동차를 통한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관광객들이 녹동항에 머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과거 소록도를 왕래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 선박일 때는 선착장 주변 횟집이나 숙박업소를 이용하는 관광객이 많았지만 지금은 소록도만 둘러보고 곧바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녹동항 주변 상인들은 "소록대교가 개통되면서 소록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크게 늘었지만 실제 녹동항 주변 식당이나 술집, 여관 등을 찾는 이는 오히려 줄었다"며 "녹동항 상권 활성화를 위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지역 대표 항구인 녹동항의 침체는 고흥 전체 지역경제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지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항구의 경제력이 흔들리면서 군청 소재지인 고흥읍의 상권도 동반 하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 군청과 경찰서, 터미널 등이 밀집돼 유동인구가 끊이지 않았던 고흥군청 앞 주변 상가들이 영업 부진을 이유로 휴ㆍ폐업을 결정하면서 원도심 공동화 현상도 심화되고 있다.

고흥군이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행정타운 이전 등의 계획을 마련했지만 재원 마련의 어려움으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고흥군은 침체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녹동항 주변 환경디자인 개선 및 야간경관 조성에 나서고 있다. 지역 특성에 맞는 환경디자인과 야간경관 조명으로 녹동항이 첨단 자연, 문화와 전통이 만나는 고품격 미항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

이와함께 군은 고흥군 도양읍 일원 91만평(일반 산업단지 64만평, 배후단지 27만평)에 '고흥 조선타운'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중형 조선소 및 연관 기자재 업체 집적화 단지를 조성해 전통적 농어촌 지역인 고흥군이 21세기 선진 도ㆍ농 복합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강력한 성장 동력으로 만든다는 것이 군의 구상이다.

조선타운에는 조선산업 시설뿐만 아니라 교육시설과 주거시설, 병ㆍ의원 등 복지시설, 기타 각종 문화체육시설 등을 갖춘 쾌적한 배후단지가 동시에 조성돼 도양읍을 전남 동ㆍ남부권 조선산업의 신 메카로 자리잡도록 할 계획이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시작된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 여파로 관련 업체들의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지역민의 기대가 충족될 지는 미지수다.

"과거 24만명에 달했던 고흥 인구가 최근엔 8만명선이 붕괴되는 등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인구 유입과 상권 회복을 통한 지역 활성화를 위해 새로운 성장동력 마련이 시급한 시점입니다."

지난 19일 고흥읍에서 정순열 고흥군번영회장을 만났다. 정 회장은 최근 목포~광양간 고속도로 구간의 고흥 나들목(IC) 설치를 위한 범군민추진위원회(범추위) 공동대표를 맡아 타당성 용역을 이끌어내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고흥을 지나는 고속도로인데 정작 고흥으로 드나들 나들목이 없다는 건 말도 안된다'는 주민들의 반발과 갈수록 쇠퇴해가는 고흥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고흥 나들목 설치는 필수라는 생각에서 추진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려움도 많았다. 시행자인 한국도로공사가 고흥 나들목 예정지였던 동강면 한천 부근엔 양쪽 터널 교량이 800m에 불과해 설치가 불가능한데다 고흥지역 진ㆍ출입을 위한 벌교읍 칠동에 벌교 나들목이 설치돼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이를 납득할 수 없었던 정 회장 등 범추위는 고흥군을 비롯해 전남도 등에 고흥 나들목 설치를 지속적으로 건의하는 한편 지역 정치인과 중앙부처를 직접 방문해 필요성을 역설했다. 범추위의 끈질긴 노력에 결국 한국도로공사는 고흥 나들목 건설을 위한 타당성 용역을 의뢰했다.

정 회장은 "고흥 발전을 위해 모든 주민들이 합심해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이라며 애써 겸손해했지만 그의 남다른 노력은 지역 내에 널리 퍼져있는 느낌이다.

고흥군번영회장으로 침체의 길을 걷고 있는 고흥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그는 "과거 해남과 함께 전남 동ㆍ서부지역을 대표하는 중심지였던 고흥이 쇠락한 원인은 자연적인 인구 감소도 한 원인이겠지만 무엇보다 지역 발전을 위한 노력과 대안 모색에 소홀했기 때문"이라며 "이제라도 고흥읍을 중심으로 한 원도심 활성화를 비롯해 다각적인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이어 "고흥군이 고흥읍에 군 청사 및 대규모 주거단지 등이 들어서는 신시가지를 조성하려는 것에 대해선 원칙적으로 찬성한다"면서 "다만 주민들과 충분한 협의를 통해 기존 청사 활용방안과 기존 상가들의 피해 최소화를 위한 노력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나로우주센터를 중심으로 추진되는 고흥 항공우주클러스터 조성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시했다.

로켓 발사 등에 따른 주변 환경파괴와 소음 피해 등에 대한 정확한 조사없이 우주센터 부지가 선정된데다 지역민에 직접적인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다.

고흥지역 활성화 방안으로는 교육여건 개선 등을 인구 유입을 첫 손에 꼽았다.

그는 "고흥지역은 청ㆍ장년층 인구 유출 및 급속한 고령화, 생산기반 미비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진단한 뒤 "고흥읍을 중심으로 한 기존 시가지 정비와 함께 우수 학교 설립 등 교육기반 구축을 통해 살고 싶은 지역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2009/09/30 19:20 2009/09/30 19:20

<남해안시대>-①`복합규제에 묶인 `블루오션'

연합뉴스 | 입력 2009.09.14 08:10 | 수정 2009.09.14 08:15

 



국립공원.수자원보호구역 중첩..천혜의 자연조건 불구 기반 열악
※편집자 주 = 부산과 경남, 전남을 아우르는 '남해안 시대'가 열리고 있다. 경남도가 남해안권 자치단체간 협력을 통한 상생과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앞장 서 주창한 지 만 5년만이다.

'동ㆍ서ㆍ남해안권발전특별법'으로 법제화된 데 이어 오는 11월이며 남해안발전종합계획안이 확정돼 구체적인 실행을 위한 발판이 마련된다.

대한민국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기대되고 있는 `남해안 시대'의 주창 배경과 당위성, 향후 전략을 3편에 걸쳐 소개한다.

(창원=연합뉴스) 정학구 기자 = 김대호 경남지사가 5년 전 처음 주창했을 때만 해도 막연한 구호로만 들렸던 '남해안 시대'가 이제 현실화되고 있다.

절경을 자랑하면서도 중첩된 규제에 꽁꽁 묶여 낙후된 남해안이 이제 새로운 미래를 향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김태호 경남지사가 부산-경남-전남을 잇는 남해안 해양경제축 개발을 공식제안한 것은 2004년 11월.

전남과 부산 정치권 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남해안발전특별법'이 발의됐고 우여곡절 끝에 '동ㆍ서ㆍ남해안권발전특별법'이란 확대된 법안의 제정으로 결실을 봤다.

남해안권 발전종합 계획안이 오는 11월께 확정되면 내년부터 개발계획과 실시설계 수립 등을 거쳐 사업이 본격화돼 2020년까지 약 26조4천억원 가량이 투입된다.

◇왜 남해안시대인가 = 김태호 지사는 대한민국의 미래 성장동력이자 새로운 시대를 여는 '블루오션'으로 남해안을 꼽았다.

남해안의 아름다운 바다와 섬을 종합적으로 개발해 해양레포츠와 크루즈, 관광, 휴양을 아우르는 '제2의 지중해'로 건설하고 연안지역을 복합경제 중심지로 키우자는 것이다.

여기엔 모든 것이 집중된 수도권에 대응하는 '제2의 성장 축'으로 남해안을 발전시켜야 장기적으로 남해안과 수도권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프랑스가 파리에서 900㎞나 떨어진 지중해 남부 연안에 리조트와 첨단 산업단지, 임해 산업단지 등을 조성해 국가균형발전과 수도권 집중완화란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 김 지사의 말이다.

현재 수도권은 남해안 1만2천519㎢보다 좁은 1만1천776㎢에 남해안(872만8천명)의 2.7배나 되는 2천371만1천명이 몰려 살고 있다.

경제활동 인구 역시 수도권에 49.9%가 집중돼 있는 반면 남해안에는 17.0%가 거주하고 있다.

수도권의 지역내 총생산(GRDP)도 5천373억 달러로 남해안 1천926억 달러의 2.8배나 된다.

수도권이나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도 남해안을 새로운 성장 축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 남해안, 어떤 곳인가 = 남해안에는 2천460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있고 청정해역 곳곳에 양식장이 들어서 있다.

부산에서 목포까지 직선거리는 약 250㎞에 불과하지만 꼬불꼬불한 리아스식 해안선의 총 길이는 약 1만㎞나 된다.

일조량도 가장 많아 연간 총 2천157시간이나 되며 개펄 면적은 2천550㎢로 전국 개펄의 17.3%를 차지한다.

남해안권에는 86개 산업단지가 있고 4천700여개 기업이 입주해 있으나 전체적인 산업별 비중을 보면 여전히 1차 산업이 높다.

특허출원 건수와 등록건수를 보면 남해안은 전국의 4.7%와 3.6%로 수도권의 52.6%와 55.4%에 비교도 되지 않는다.

중국의 동북 3성을 비롯해 일본 긴키, 한국 수도권 등을 포함한 동북아 10대 경제권 속에서 남해안은 인구나 GRDP 측면에서 최하위권을 맴돈다.

다행스러운 것은 신재생 에너지인 태양광과 수력발전량은 33.5%와 83.5%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등 녹색성장에 적합한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잠재적인 관광자원이 엄청난데 비해 기반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총 2만5천475㎞에 이르는 도로의 포장률은 전국 평균 78.3%에도 못미치고 전남과 경남은 70%를 밑돈다.

남해안 고속도로는 십수년간 상습체증에 시달리고 있고 확장공사가 이제야 진행 중이다.
고성과 통영 등 서부와 중ㆍ동부 경남을 잇는 국도들은 주말과 휴일에 차량행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철도 역시 일제시대 이후 거의 손을 대지 않아 단선(單線)으로 운행돼오다 최근 복선(復線) 전철화 공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진척도는 더디다.

◇ 남해안과 복합 규제 = 남해안 자치단체들이 아름다운 풍광을 자산으로 관광개발에 나서려고 해도 해상국립공원과 수산자원보호구역, 문화재보호구역 등 중복 규제에 묶여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경남 통영ㆍ거제ㆍ사천ㆍ남해ㆍ하동 등은 한려해상국립공원(면적 546㎢)으로, 전남 여수ㆍ고흥ㆍ거문도 등은 다도해국립공원(2천321㎢)으로 각각 묶여 있다.

이 해상국립공원이 남해안에만 존재하는데다 수산자원보호구역도 10곳 가운데 9곳(6천521㎢)이 남해안에 집중돼 있다.

이 때문에 도와 각 시ㆍ군이 추진하려던 각종 개발계획은 번번이 제동이 걸렸다.
남해안이 최적의 장소인 요트산업 클러스터를 통영시 일원에 설치하려고 했지만 수산자원보호구역에 묶여 어려움을 겪었다.

거제 해금강 집단시설지구와 마산 구산해양관광단지, 사천 비토관광지 개발, 하동 선블루리조트, 통영 해전사박물관, 통영 해상케이블카 설치사업 등이 줄줄이 같은 운명을 겪었다.
2009/09/30 19:19 2009/09/30 19:19

고흥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녹동항은 규모는 작지만 고흥 지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과거 녹동항은 남해연안 어업 전진기지로 수산물이 풍부해 풍요로움을 누렸다. 여기에 더해 녹동항에서 600m 떨어진 '작지만 아름다운 섬' 소록도는 고흥의 대표적 관광지로 일반인의 발길이 이어져 녹동항 주변 상권 활성화를 가져왔다.

녹동항과 지척인 소록도는 섬 전체가 한센병 환자를 위한 병원지역으로 지정돼 과거엔 외부인들의 출입이 통제됐다. 그러나 1988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면서 아름다운 풍광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관광객은 녹동항을 통해 소록도를 찾게 됐다.

항구 바로 앞에 눈에 잡힐 듯 떠있는 소록도와 사시사철 풍부한 어패류가 생산된 녹동항이 고흥을 대표하는 '금싸라기 땅'이 된 이유다.

어획고가 꾸준히 늘면서 수산물 가공공장을 비롯한 어망 등 어구 판매점, 얼음공장 등 연관업체가 연이어 들어섰다. 소록도 관광객을 겨냥한 음식점, 숙박업소도 호황을 누렸다.

항구 주변 상권이 활기를 띠면서 인구도 꾸준히 늘었다. 녹동항이 포함된 고흥군 도양읍의 인구 수가 군청 등 행정기관이 밀집된 고흥읍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녹동항은 그러나 여느 항ㆍ포구와 마찬가지로 1980년대 이후 어획량이 급감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곳에서 주로 잡히는 대표 어종은 광어, 우럭, 돔, 낙지, 갯장어 등이었지만 먼 바다의 싹쓸이 조업 및 어선 감척사업 등의 여파로 최고의 활황을 누렸던 때와 비교할 땐 어획고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최근 고흥군 수협 위판액은 2007년 540억원에서 지난해 610억원으로 늘었다. 그러나 이는 활어 등의 어획고 증가가 아닌 물김 작황이 좋았기 때문이다.

고흥군 수협 관계자는 "꾸준한 감소세를 보이던 위판액이 최근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며 "가장 큰 원인은 양식 규모가 확대되면서 패류 생산이 늘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어획량이 들쭉날쭉한 고기만 잡아선 생계유지가 힘들다고 판단한 어민들이 양식장에 눈을 돌리면서 소득 창출에 나섰고,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외지인들의 소록도 방문 증가에 따른 관광 수입은 어패류 위판과 함께 녹동항 경제력을 지탱하는 한 축이다. 소록도에는 70세 이상인 주민 620여 명과 의료진 180여 명이 살고 있다. 하지만 소록도에는 관광객이 머물고 쉴 수 있는 시설이 전무한 상태. 녹동항이 소록도의 배후 관광단지 역할을 맡게 된 이유다.

특히 지난 3월 도양읍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총 연장 3460m의 소록대교 개통으로 접근성이 크게 향상되면서 섬 주민들의 바깥 나들이가 원활해졌고, 관광객이 늘면서 항구 활성화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그러나 이같은 외적인 변화가 녹동항 주변 상권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진 않았다. 소록대교 개통으로 자동차를 통한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관광객들이 녹동항에 머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과거 소록도를 왕래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 선박일 때는 선착장 주변 횟집이나 숙박업소를 이용하는 관광객이 많았지만 지금은 소록도만 둘러보고 곧바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녹동항 주변 상인들은 "소록대교가 개통되면서 소록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크게 늘었지만 실제 녹동항 주변 식당이나 술집, 여관 등을 찾는 이는 오히려 줄었다"며 "녹동항 상권 활성화를 위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지역 대표 항구인 녹동항의 침체는 고흥 전체 지역경제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지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항구의 경제력이 흔들리면서 군청 소재지인 고흥읍의 상권도 동반 하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거 군청과 경찰서, 터미널 등이 밀집돼 유동인구가 끊이지 않았던 고흥군청 앞 주변 상가들이 영업 부진을 이유로 휴ㆍ폐업을 결정하면서 원도심 공동화 현상도 심화되고 있다. 고흥군이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행정타운 이전 등의 계획을 마련했지만 재원 마련의 어려움으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고흥군은 침체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녹동항 주변 환경디자인 개선 및 야간경관 조성에 나서고 있다. 지역 특성에 맞는 환경디자인과 야간경관 조명으로 녹동항이 첨단 자연, 문화와 전통이 만나는 고품격 미항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

이와함께 군은 고흥군 도양읍 일원 91만평(일반 산업단지 64만평, 배후단지 27만평)에 '고흥 조선타운'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중형 조선소 및 연관 기자재 업체 집적화 단지를 조성해 전통적 농어촌 지역인 고흥군이 21세기 선진 도ㆍ농 복합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강력한 성장 동력으로 만든다는 것이 군의 구상이다.

조선타운에는 조선산업 시설뿐만 아니라 교육시설과 주거시설, 병ㆍ의원 등 복지시설, 기타 각종 문화체육시설 등을 갖춘 쾌적한 배후단지가 동시에 조성돼 도양읍을 전남 동ㆍ남부권 조선산업의 신 메카로 자리잡도록 할 계획이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시작된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 여파로 관련 업체들의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지역민의 기대가 충족될 지는 미지수다.

박성원 기자 swpark@jnilbo.com
고흥=류준석 기자 jsryu@jnilbo.com


"한때 24만 군민이 이젠 8만명도 안돼"
■ 정순열 고흥군번영회장

과거 24만명에 달했던 고흥 인구가 최근엔 8만명선이 붕괴되는 등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인구 유입과 상권 회복을 통한 지역 활성화를 위해 새로운 성장동력 마련이 시급한 시점입니다."

지난 19일 고흥읍에서 정순열 고흥군번영회장을 만났다. 정 회장은 최근 목포~광양간 고속도로 구간의 고흥 나들목(IC) 설치를 위한 범군민추진위원회(범추위) 공동대표를 맡아 타당성 용역을 이끌어내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고흥을 지나는 고속도로인데 정작 고흥으로 드나들 나들목이 없다는 건 말도 안된다'는 주민들의 반발과 갈수록 쇠퇴해가는 고흥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고흥 나들목 설치는 필수라는 생각에서 추진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려움도 많았다. 시행자인 한국도로공사가 고흥 나들목 예정지였던 동강면 한천 부근엔 양쪽 터널 교량이 800m에 불과해 설치가 불가능한데다 고흥지역 진ㆍ출입을 위한 벌교읍 칠동에 벌교 나들목이 설치돼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이를 납득할 수 없었던 정 회장 등 범추위는 고흥군을 비롯해 전남도 등에 고흥 나들목 설치를 지속적으로 건의하는 한편 지역 정치인과 중앙부처를 직접 방문해 필요성을 역설했다. 범추위의 끈질긴 노력에 결국 한국도로공사는 고흥 나들목 건설을 위한 타당성 용역을 의뢰했다.

정 회장은 "고흥 발전을 위해 모든 주민들이 합심해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이라며 애써 겸손해했지만 그의 남다른 노력은 지역 내에 널리 퍼져있는 느낌이다.

고흥군번영회장으로 침체의 길을 걷고 있는 고흥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그는 "과거 해남과 함께 전남 동ㆍ서부지역을 대표하는 중심지였던 고흥이 쇠락한 원인은 자연적인 인구 감소도 한 원인이겠지만 무엇보다 지역 발전을 위한 노력과 대안 모색에 소홀했기 때문"이라며 "이제라도 고흥읍을 중심으로 한 원도심 활성화를 비롯해 다각적인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이어 "고흥군이 고흥읍에 군 청사 및 대규모 주거단지 등이 들어서는 신시가지를 조성하려는 것에 대해선 원칙적으로 찬성한다"면서 "다만 주민들과 충분한 협의를 통해 기존 청사 활용방안과 기존 상가들의 피해 최소화를 위한 노력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나로우주센터를 중심으로 추진되는 고흥 항공우주클러스터 조성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시했다.

로켓 발사 등에 따른 주변 환경파괴와 소음 피해 등에 대한 정확한 조사없이 우주센터 부지가 선정된데다 지역민에 직접적인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다.

고흥지역 활성화 방안으로는 교육여건 개선 등을 인구 유입을 첫 손에 꼽았다.

그는 "고흥지역은 청ㆍ장년층 인구 유출 및 급속한 고령화, 생산기반 미비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진단한 뒤 "고흥읍을 중심으로 한 기존 시가지 정비와 함께 우수 학교 설립 등 교육기반 구축을 통해 살고 싶은 지역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2009/09/30 19:18 2009/09/30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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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ront of.......


2009/09/30 19:13 2009/09/30 19:13
2009년 8월 20일 하루 일과를 마치고 드디어 2달 전부터 계획 했던 행군을 시작 하기로 했다.

분당 미금역 에서 밤 11시에 출발 첫날 분당 탄천 길을 따라서 한강까지 강행군을 했다 .

새벽 5시 30분까지

다리 아픈건 둘째고 / 잠과에 싸움이였다.

반포대교 에서 2시간 정도 취침을 하고 일어나기로 결정.

강 바람이 너무 추워서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1시간 가량 취침을 하고 다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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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취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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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기운을 차려서 .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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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무릅에 통증이 오기 시작 했다 . 그래서 붕대를 감고 잠시 약 10분 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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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통증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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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토요일 새벽 쯤 영종도에 도착 했다.

선배님 폰에 사진이 있어서 첨부할수가 없어

마지막 완주 모습을 곳

이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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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드디어 영종도 도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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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고생하신 일규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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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4 11:31 2009/08/24 11:31
전남 2분기 부동산 거래량·가격 상승세
2012여수세계박람회·광양만권 개발·투자기업 유치 등 개발호재 작용
목포 43%·신안 33%·강진 28%·보성 27%·여수22%·담양 22% 상승

지난 1분기 하락세를 보이던 전남지역 부동산 경기가 2분기 들어 거래량이 증가하고 가격이 상승하는 등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7일 전남도에 따르면 국토해양부와 22개 시·군 등의 2009년 부동산 동향자료를 분석한 결과 3만9,352건이 거래돼 하락세를 보인 지난 1분기보다 2분기 들어 12% 증가한 총 4만4,240건이 거래됐다.

이중 토지가 3만6,180건으로 1분기에 비해 13% 증가했고 건물은 8,060건으로 8% 증가했다.

시군별로는 목포가 43% 증가한 것을 비롯해 신안 33%, 여수 22%, 순천 18%, 광양 13% 등으로 늘었다.

그러나 무안이 18% 하락하는 등 영암 8%, 고흥 5%, 곡성 2%로 각각 소폭의 거래량 감소를 기록했다.

전남도는 이 같은 상승세에 대해 목포는 신도시 아파트 분양 및 거래 증가, 신안은 허가구역 해제 따른 영향 그리고 전남 동부권 지역은 2012여수세계박람회, 신대지구 개발, 포스코 후판공장 건설 등 개발호재 등에 힘입어 증가한 것으로 풀이했다.

부동산 매입자 거주지별로는 도내 거주자 거래가 2만9,673건으로 1분기에 비해 7% 증가했고, 서울 등 전남지역외 거주자 거래는 1만4,567건으로 26%가 증가했다.

토지용도별로는 임야가 5,303필지로 32%, 공장용지 99필지로 24%, 대지는 1만1,267필지로 14%, 농지 1만7,888필지로 6%, 기타 1,623필지로 43% 증가했다.

주택가격도 상승세를 나타냈다.

국민은행 통계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남지역 주택가격 변동율은 1분기 0.74%가 하락한 반면 2분기는 0.37% 상승했다.

주요지역별 아파트가격 변동율은 1분기 목포 0.04%, 순천 -1.48%, 광양 0.94%, 여수 -0.46%에서 2분기는 목포 0.61%, 순천 0.57%, 광양 2.52%, 여수 0.96%로 상승추세다.

아파트 가격은 1분기 0.40% 감소한 반면 2분기에는 1.0% 상승했다.

전남도는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과 2012여수세계박람회, 광양만권 개발, 투자기업 유치 등 개발호재와 맞물려 나타나는 현상으로 평가했다.
2009/08/16 23:36 2009/08/16 23:36
농어촌 도서벽지 거동이 어려운 계층에 심신기능 향상

고흥군(군수 박병종)이 특수시책사업으로 보건진료소 목욕서비스사업을 펼치고 있어 주위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농어촌의료서비스 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이 사업은 농어촌도서벽지에 위치한 보건진료소 5개소(도양읍 시산, 도덕면 가야, 영남면 남열, 포두면 오취, 점암면 화계)에 개소 당 33㎡의 목욕탕 시설을 갖추고 노령 또는 거동이 어려운 계층을 대상으로 목욕, 피부마사지, 건강체크, 물리치료 등을 해오고 있다.

자력으로 목욕이 어려운 거동 불편자를 위해 신체 청결상태 유지로 심신기능향상과 1차적 욕구를 해결하고 노인들의 욕창, 세균 감염 등의 합병증 발생을 사전 예방하게 되어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진료소장이 주축이 되어 마을건강원과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주 1∼2회, 각 진료소별 20∼30명 단위로 운영하며, 참여 봉사자는 친어머니와 같이 등을 밀어주고 말벗이 되어주는 등 경로효친과 공동체 의식을 쌓아가는 계기가 되고 있다.

또한 점암면 화계진료소(소장 권미자)에서는 고흥읍 소재 목욕탕과 목욕사업 계약을 체결하고 마을 주민 30여 명을 대상으로한 주 1회 혈압과 당뇨 체크를 한 후 입욕하게 되며 목욕비는 물론 간식, 교통 편의까지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한편 포두면 오취 진료소장(소장 곽민숙)은 "처음 이 사업을 시작할 때는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주민들이 너무 좋아하셔서 보람을 느낀다며 겨울 어르신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고 따뜻한 겨울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전했다.

출처 : 고흥군청
2009/08/16 23:29 2009/08/16 23:29

□ 연혁

- 조선시대에는 여천군 화정면의 적금도를 포함 관할하다가 1897년에 산내면(山內面)과 산외면(山外面)으로 분활되었으나 1907년에 다시 점암면으로 통합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에 흥양군을 고흥군으로 바꾸면서 적금도를 여천군 화정면에 이관 하고 15개리를 관할하며 군조례(郡條例) 제155호에 의하여 1966. 12. 1설치된 양사 출장소가 15개리중의 금사(錦蛇), 양사(楊蛇), 남열(南悅), 우천(牛川) 등 4개리를 관할하여오다 1986. 4. 1 대통령령 제11814호에 의거 산내면으로 분면되었음.


본면의 금사리는 본래 조선시대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이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
이곳에 종3품(從三品)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주둔하였고 사도진첨사는 회령포(會寧浦:장흥), 달량(達梁:영암), 여도(呂島:점암면 여호리), 마도(내발리), 돌산도(突山島:여천)의 7개수군만호진을 휘하에 두었다.


본면의 여호리(呂湖里) 또한 전라좌수영 사도진에 속한 여도진(呂島鎭)이 설치되어
이곳에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주둔하였다. 영조때의 점암면은 호수 1,172호에 인구는 4,512인으로남자 2,213인, 여자 2,299인이며 흥양현으로부터 30리라 하였고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선생의 대동지지(大東地誌)에는 점암면이 흥양현 동쪽 20리에서 50리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 지역특성

- 점암면은 고흥군 16개 읍면중 면적이 가장 넓은 면으로 제일 적은 대서면보다는 갑절이 넘지만 군내에서 가장 높은 팔영산(八影山)이 웅립(雄立)하여 면의 대부분이 산지(山地)로 되어 있다.


  북쪽은 과역면과 접하며 서쪽은 두원면과 남쪽은 해창만간척지에 의하여 포두면과 이어지고 동쪽은여자만을 사이에 두고 여천군 화정면 적금도 및 남도와 마주 대한다. 북서쪽과 남쪽에 약간의 평야가 있으며 해창만(海倉灣)간척으로 농지가 늘어나고 있다. 면의 서쪽을 횡단하여 국도 15~27호선이통과하며 지방도가 연봉리(淵鳳里)의 국도에서 갈려 나와 포두면과 연결된다.


지질(地質)은 대부분이 중생대 백악기의 산성화산암으로 형성되어 있으나 북쪽 성기리(聖基里) 주위에화강암이 분포되어 있고 동쪽 일부만이 중성화산암지대이다.
간척사업으로 육지화된 섬이 많고 유인도7개와 무인도 7개가 있으며, 주민은 온순, 순박하다.


□ 전래전설


중국 진나라 시황제가 장생부사 하기 위해 불로초를 구하라는 영을 내려 찾던 중 어느날 시황제가 세수를 하는데, 여덟 봉우리가 있는 산이 세수대야에 비추자 이산이 필경 령산이고 틀립없이 불로초가 이 산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 동남, 동여 각 500명을 시켜 찾도록하여 천신만고 끝에 한반도 남쪽에 있는 산을 찾아 황제에게 보고하였으며 이 때부터 팔영산의 "영"자가 신령"령(靈)"자가 아닌 황제의 세수물에 그림자가 비췄다고하여 그림자 "영(影)"자를 쓰고 있다고 전하고 있으며, 송팔응 장군이 젊어서 팔영산에서 무예를 기를 때 자기의 애마와 화살 중 누가 더 빠른가를 시험하기 위해 팔봉에서 화살을 지금의 점암저수지 방향으로 쏘은 후 백마를 채찍질하여 저수지 부근에 왔으나, 말이 화살보다 늦게 도착한 것으로 판단 말의 목을 칼로 치고 난 다음 화살이 도착하였다는 팔응봉 전설도 함께 전하고 있음.


□ 고장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


(조선시대)





- 김몽개(점암 용두) : 연일현감 역임.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 막하에서 공훈

- 김몽표(점암 용두) : 사복시주부 역임.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 막하에서 공훈

- 송홍열(점암 봉남) : 사헌부 감찰, 단성현감, 재주판관, 경상수군누후 역임.

- 송세발(점암 신안) : 임진왜란 때 우부장에 제수, 선무원종훈에 기록

- 김덕인(점암 오리) : 정유재난 참전 순절, 통훈대부중추부사 추증

- 송세즙(점암 신안) :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으로 현내량 전과, 원종 2등 훈책록

- 송응경(점암 봉남) : 선조때 무과급제, 정유재란 때 사복시정으로 왜적격파,

                            원종2등 공신 책록

- 송 한(점암 서정) :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 작전참모, 선무원 종훈책록

- 정영인(점암 용강) : 한성부 판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전사

                            선무원종훈에 책록, 금산대첩단에 배향


 


(해방이후)



- 류성갑(대룡리 203번지, 1910. 11. 11) : 제헌국회의원

- 이대순(신안리 427번지, 1933. 4. 18)

- 전라남도 교육감

- 제11, 12대 국회의원

- 민주정의당 원내총무

- 체신부장관

- 호남대 총장

- 백형조(장남리 777번지, 1936. 3. 28)

- 전라남도 경찰국장

- 전라남도지사

- 경찰청 상근위원


□ 유명산, 등산로, 낚시터


팔영산 : 해발 608m, 고흥군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정상에서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절경과 해창만 등 고흥군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명산으로 제1봉: 유영봉, 제2봉 : 성주봉, 제3봉 : 생황봉, 제4봉 : 사자봉, 제5봉 : 오노봉, 제6봉 : 두류봉, 제7봉 : 칠성봉, 제8봉 : 적취봉(일명 깃대봉)의 기암괴석으로이루어진 여덟 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년중 수많은 등산객이 찾고 있음.
 

- 등산로 : 팔영산 등산로는 능가사 좌측 골짜기로 입산하여 제1봉에서 시작 8봉쪽에서 하산하는 약 3시간정도 소요되는 등산코스가 있어 1일 등산코스로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등산로가 있어 주말이면 400~500여명의 등산객이 찾고 있음. 


- 낚시터


- 바다낚시 : 여자만


- 민물낚시 : 해창만, 강산담수호(12만평), 점암저수지(10만평)


□ 능 가 사


위치와 창건


    楞伽寺는 全羅南道 高興郡 占岩面 聖基里 평촌마을 369번지 일대 八影山 기슭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소속 사찰이다. 지형은 거의 평탄하며 건물은 남북종축선상에 들어서 있다. 건물의 배치는 현재 사찰 정문격인 天王門이 정면에 있고 100m 거리를 두고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 뒤편 좌측으로 원음료(요사채)가 있고 그 뒤로 응진당이 있다.
 

    고흥은 조선시대에 興陽縣이라 불렀으며 팔영산은 때로 八顚山이라고도 하였다. 능가사를 품에 안은 팔영산은 제1봉 유영봉(儒影峰), 제2봉 성주봉(聖主峰), 제3봉 생황봉(笙篁峰), 제4봉 사자봉(獅子峰), 제5봉 오노봉(五老峰), 제6봉 두류봉(頭流峰), 제7봉 칠성봉(七星峰), 제8봉 적취봉(積翠峰)으로 우람하고 아기자기하게 다가온다.
 

    기록에는 417년 신라 눌지왕 때 阿度和尙이 창건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 지역이 5세기에는 백제지역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아도에 의한 창건설은 다소 문제가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나 그 이후의 남북국시대(신라통일기) 또는 고려시대에 고흥 지역에 능가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로서는 능가사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느 시대에 창건되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능가사란 명칭은 임진왜란 이후 중창하면서 새로 지은 寺名이며 그 이전에는 보현사였다.


    현존 건물은 대웅전(58.3평)과 응진당(19.7평), 사천왕문(22.3평), 원음료(요사채;23.2평) 등이 있으며 돌담으로 둘러진 寺域 면적은 3,217평이다.


□ 연 혁


- 이렇듯 창건 이후 연혁은 잘 알수 없지만 普賢寺라는 절은 훗날 능가사로 고쳐 불렀다고 하므로 조선전기에 이곳에 절이 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왜냐하면 1530년 간행된『新增東國餘地勝覽』의「興陽縣 佛宇」조에 보현사는 佛盖寺와 함께 八顚山에 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 즉 16세기에 팔영산에는 능가사의 전신인 보현사라는 절이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능가사는 적어도 조선전기에는 팔영산에 존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 그 뒤의 연혁은 조선후기에 쓰여진 몇가지 기록이 전한다.

1712년(숙종 38)에 쓰여진「楞伽寺始創前後檀越綠序」와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吳遂采(1692~1759년)가 1762년(영조 2)에 지은 것으로서 임진왜란 이후 절의 중창에 관하여 기록해 놓은「全羅道興陽顯八影山楞伽寺事蹟碑」, 그리고 능가사에 속한 암자의 중수 기록인「八影山西佛庵重修記」와「萬景庵重修記」등이『朝鮮寺刹史料』에 실려있다.


- 이 가운데 절의 연혁에 관해 가장 자세하게 수록된 것은 吳遂采의「楞伽寺事蹟碑」이다. 이 비는 현재 절 경내에 전해지고 있는데, 비문에 의하면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된 절은 임진왜란 때 왜구들에 의하여 소실 폐사가 되어 버렸다가 1644년(인조 22)에 碧川 正玄 대사가 중창하였다. 정현대사가 하안거 중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것은 한 신승이 나타나 "장부로 태어나 부처가 되기는 어려우니 역시 마땅히 대공 덕주가 되어 종풍을 弘布하겠다."는 말을 남긴 것이다. 이에 정현대사가 廣熙大師와 함께 산을 살피던 중 산 남쪽에서 옛 절터를 발견하여 전각과 요사체, 불상, 탱화, 종각 등 佛事를 일으켜 중창주가 되어 능가사를 始創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 꿈에서 취한 것이었다. 그 뒤 정현스님이 입멸하자 그의 제자인 敏煖·義軒·尙機스님 등이 스승의 유지를 붸아 일주문과 요사체 등을 세우고 단청 불사를 함으로써 절을 더욱 크고 새롭게 면모를 일신하였다. 일련의 寺刹 當宇 불사가 이루어지자 寺僧 遂明이 楞伽寺의 事蹟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겨 천리를 달려 통정대부흥문관부제학지제교겸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吳遂采에게 글 지어 줄 것을 청하여 숙종 16년(1690)「楞伽寺事蹟碑」를 건립하였다.

  


- 그러니까 조선전기에 보현사라는 절이 팔영산에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지자 17세기 중엽에 벽천 스님이 중창하고 이름을 고쳐 능가사라 했던 것이다.


- 벽천에 의해 중창된 당우가 당시 모두 20여 동이 되었다고 하므로 절의 규모가 적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 당시의 전각 이름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다른 기록을 통하여 일부 전각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懸辯 枕肱(1616~1684년) 스님의『침굉집』에 실려 있는「八嶺山楞伽寺大殿募綠文」을 통하여 法雲殿이 먼저 세워지고 이후 淸心寮와 屹靈寮가 만들어진 뒤에 다시 대전을 세우기 위하여 널리 시주는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性聰 栢庵(1631~1700년)스님의『백암집』에 실려 있는「八影山楞伽寺八相殿權綠疏」를 통해서도 17세기 후반에 팔상전을 세우기 위한 불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사적비 음기에 기록된 인조 22년(1644)에서 숙종 14년(1688) 사이에 중창된 사찰의 규모는 아래와 같다.

  


- 殿堂 : 도원당, 대우전, 팔상전, 응진당, 영산전, 시왕전, 향로전, 영청당, 영당, 명부전, 향적전, 신영당, 능인전, 승당, 보현전, 흘영료, 원흥료, 어심전, 선당, 금화전, 법운전, 청하당, 문수전, 양진당, 공백료, 영흥료, 출세료, 관풍료, 송월료, 청심료, 도솔전, 묘적당, 태금전, 복련당, 부도전, 환희각

  


- 문루 : 일주문, 대루, 정문, 해탈문, 천왕문

   


- 암자 : 만경암, 비로암, 원각암, 중각암, 석문암, 수월암, 서부사암, 동부사암, 묘각암, 지장암


- 대가람의 면모를 능히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다. 그 뒤 영조 44년(1768)과 철종 14년(1863) 중수하였다.
 

- 능가사가 始創된지 54년 뒤인 숙종 24년(1698) 범종 불사가 있었다. 한편 道安 月渚(1638~1715년) 스님의『월저당대사집』에「호남능가사염송설화수자발」이 실려 있는데 이를 통해 1,700개의 公案이 실린「拈頌說話」라는 책을 절에서 판각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불전 목판이 제작되어 佛經을 印出하기도 하였는데 연대순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697년『大藏一覽集』康熙三十六年歲次丁丑正月日全羅道八影山楞伽寺開板/ 고려대학교 소장, 1707년(숙종 33)『禪門拈頌說話』康熙四十八年丁亥七月日全羅道興陽八影山楞伽寺開刊/ 서울대학교 규장각(30권 10책), 1707년『禪門拈頌集』康熙四十八年丁亥七月日全羅道興陽八影山楞伽寺開板/ 개인소장이다. 그리고 도안의 제자인 雪巖 秋鵬(1651~1706년) 스님이 능가사의 수려한 경치를 읊은「題八影山楞伽寺」라는 시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절은 한 때 호남의 승경지로 이름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7세기 중엽의 중창 이후 18세기 전반에는 불서를 판각 간행할 수 있을 만큼 절이 번성했던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그러나 17세기의 중창 이후 절이 어떤 변천을 해왔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실학자 申景濬(1712~1781년)이 쓴『伽鹽考』에는 능가사가 이름이 보이지 않으며, 1779년(정조 3)에 편찬된『梵宇攷』에는 '능가사와 中興寺는 八顚山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단은 18세기 후반에 절은 이미 폐사가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까? 그러나 이는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듯하다.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輿地圖書』의 전라도 흥양 사찰조에 '능가사는 팔전산에 있으며 현의 동쪽 30리 이다.'라고 되어 있고, 이어서 '보현사·隱寂寺·佛盖寺는 지금은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곧 능가사가 18세기 후반에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또한 조선후기의 실학자 李重煥(1690~1752년)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어디인가라는 관점에서 전국 각지의 정치, 경제, 풍속, 인심 등을 적은 인문지리서『擇里志』를 지었는데, 그 중의「卜居總論」가운데 山水條에서 특별히 능가사를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그 내용을 보면, '능가사는 팔영산 아래에 있는데 옛날 琉球의 태자가 표류하여 와서 이 절 앞에서 관음보살에게 7일 밤낮을 기도하여 고국에 돌아가게 해 달라고 청하였더니 大士가 나타나 태자를 옆에 끼고 파도를 넘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절의 스님이 그 형상을 벽에 그려 놓았는데 이중환 당시에도 그 그림이 그대로 있었다고 하였다.


- 그러니까 18세기 후반에 능가사는 폐사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사세를 유지하고 있었고 관음신앙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는 셈이다. 능가사 소속 암자는 서불암과 만경암 등 11개 암자가 있었다고 사적비에 전하나 현존하는 암자는 없고 암자터로 추정되는 곳은 팔영산 주위에 여러 곳이 있다. 19세기의 상황은 西佛庵과 萬景庵중수기를 통해 대강 짐작할 수 있다.


- 서불암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옛날 보현사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능가사 별암 가운데 으뜸되는 암자로 원래 西不思義庵이었으며 서불암 혹은 서암으로 불려졌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마치 하늘에 닿아 있는 듯하였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조망이 좋아서 바다와 하늘이 한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서불암은 능가사와 흥폐를 같이 했는데 개화기인 1889년(고종 17)에 雪巖이 중수한 바 있다. 또 암자 동쪽에 조금마한 전각을 지어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기도 했는데, 이는 雪巖의 弟子인 性眞이 申箕善(1851~1909년)에게 청해 지은「능가사서불암중수기」(1894년;고종 31)를 통해서 알 수 있다.


- 만경암은 1903년 申昶模가 쓴『만경암중수기』에 의하면 417년(눌지왕 1)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으며 安養寺와 龍門寺 두 절이 합해져 능가사가 되었고 옛날에는 普賢庵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암자도 인조 22년(1644) 圓覺寮·浮屠殿 등과 함께 正玄大師가 중창하였는데 이후 4차례 개수되었다. 철종 8년(1857) 先師 綺城堂이 更新하였다.

  



- 암자 당우가 1900년(庚子) 봄에 火災를 만났으나 見松, 瞑鶴이 廻向하였다. 3년이 지난 1902년(壬寅) 겨울 스님들과 신도들이 발원 모연하여 3년전에 있었던 재앙을 말끔히 복구하였다. 즉 院樓 殿房을 엮어 한꺼번에 專制를 열어 확장하였다고 한다.

1918년(戊午)에는 만경암을 중수하고 그 기념비를 대웅전 옆에 건립했다. 팔영산 제7봉 아래에 無用堂 秀演大師가 七峰庵을 지어서 수행했다는 기록이『無用堂集』에 전하고 암자터가 남아 있다. 益淳(道忍의 門徒)스님은 梵唄에 능하였는데, 그의 문도는 크게 성하여 널리 퍼졌다. 또한 碧梧와 그의 제자 설암, 儀觀, 炯然이 머물렀던 암자였다.

   


- 이처럼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부속 암자들이 중창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능가사의 명맥이 유지되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최근에는 1990년대 초 法船 스님과 正行 스님 이후 종밀 주석하고 있으며 1993년 응진당 그리고 1995년 사천왕문을 각각 중수하였다.


□  능가사 관계 기문


절의 연혁 또는 불사 뒤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기록한 현판 檀越錄 등 절에 관계된 글이 여럿 전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 절의 연혁을 살피는데 중요한 것이므로 그 목록을 다음과 같이 표로 정리해 보았다.

이 름
 지은이
 연 대
 위치와 출전
 
팔령산능가사대전모연문
 현변 침굉
 17세기 후반
 한국불교전서
 
팔령산지장암단청모연문
 현병 침굉
 17세기 후반
 한국불교전서
 
팔영산능가사팔상전권연소
 백암 성총
 17세기 후반
 한국불교전서
 
능가사염송설화수재발
 도안 월저
 17세기 후반
 한국불교전서
 
능가사시창전후단월록서
 慧 玄
 18세기 초
 조선사찰사료
 
능가사사적비
 오 수 채
 1726년(영종 2)
 능 가 사
 
팔영산서불암중수기
 신 기 선
 1894년(고종 31)
 조선사찰사료
 
만경암중수기
 신 창 모
 1903년(광무 7)
 조선사찰사료
 
만경암중수기기념비
 
 1918년
 능 가 사
 



□ 주요인물


- 영해 약탄 : 능가사에 주석한 여러 고승 가운데 대표적인 분으로 影海 若坦(1668~ 1754년)스님이 있다. 스님은 고흥군 粉川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통정대부 金中生이다.


1677년(숙종 3) 능가사에서 출가하여 得牛 長老의 제자가 되었고, 17세에 당대의 고승 無用 秀演(1654~1719년) 대사에게 가르침을 얻었다. 22세부터 불경을 배웠는데 28세 때 어머니가 죽자 '唯心'의 禪旨를 깨닫고는 고된 참선 정진을 시작했다고 한다. 1704년에 慈愛庵에서 많은 학승을 지도하였고, 송광사 등 호남의 여러 사찰에 머물면서 선교의 大匠으로 이름을 널리 떨쳤다. 1726년에는 오수채의「全羅道興陽縣 八影山楞伽寺蹟碑」의 비음을 썼고, 1728년에는 송광사에 머물렀다. 1754년(영조 30) 제자인 楓巖 世察(1688~1767년)에게 법을 물려준 뒤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고, 부도는 능가사와 송광사에 세워졌다.


 

- 스님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고에도 박학했으며, 음양학과 수학에도 능통하였다 한다. 저서로는 문집 3권이 있었으나 지금은『영해대사문집』1권만이 전한다. 이 책에는 주로 詩句가 실려 있는데, 스님의 사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  능가사 유적유물


- 현재 능가사에는 대웅전과 응진당, 원음료(요사채), 천왕문, 종각 등의 전각이 있다. 대웅전과 응진당은 조선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건축사적으로 중요하다.


 

- 종각 내의 범종은 1698년의 조성 시기에 뚜렷해 조선시대 중후기의 양식을 가늠하는 작품이며, 절 경내에 있는「楞伽寺事跡碑」는 절의 연혁에 관해 알 수 있어 중요하다. 이외에도 대웅전 앞에는 1918년 건립한「만경암중수기념비」가 있고, 경내외에 이곳에 주석하셨던 스님들의 부도 10기가 있다.

또한, 조선후기에 만든 공예품과 명문기와가 여러장 전해 오고 있다. 특히「王妃殿下壽齊年」과「世子邸下壽千秋」축원패는 매우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보이는 목공예품이다.

용과 봉황, 구름, 연꽃무늬 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왕가의 만수무강을 비는 정성이 깃들어 있다. 한쌍의 목조 업경대도 죄업을 비추어 주는 듯 둘레의 불꽃무늬가 활활 타오르는 모습이다. 막새와들은 당시 사찰의 규모와 중수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 능가사에서는 불전목판을 제작하여 佛典을 印出 널리 보급하였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경전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697년『大藏一覽集』康熙三十六年歲次丁丑正月日全羅道八影山楞伽寺開板/ 고려대학교 소장, 1707년『禪門拈頌說話』康熙四十八年丁亥七月日全羅道興陽八影山楞伽寺開刊/ 서울대학교 규장각(30권 10책), 1707년『禪門拈頌集』康熙四十八年丁亥七月日全羅道興陽八影山楞伽寺開板 개인소장 등이다.



1. 대웅전(大雄殿) : 조선후기(17세 후반), 현재 국가보물 제1307호



- 대웅전은 18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이다.

비교적 규모가 크고 웅장하며 북쪽을 향한 것이 특색이다. 약하게 배흘림을 둔 두리기둥 위에 창방과 평방을 걸고 공포를 올렸으며 공포는 내 4출목, 외 3출목의 다포양식으로 되어 있다. 주간포는 御間 3구, 狹間 2구, 退間 1구씩 놓았다.

첨차는 교두형이며 쇠서는 앙성형으로 뾰족하게 처리하였다. 천장은 종량 위로만 우물천장을 가설하였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처마는 전후면 겹처마이다. 창호는 어칸은 四分閤 빗살문, 협칸은 쌍여닫이, 퇴칸은 외영닫이문으로 처리하였다. 뒷면에도 쌍여닫이문을 3곳에 뒤었다.


 

- 안에는 삼존불상과 보살상 2체와 후불탱황 3폭, 칠성탱화·제석천룡탱화·산신탱화 등이 있다.


 

- 불상은 높직한 수미단을 마련하여 봉안하였는데 재료는 목조이며 개금을 하였다. 삼존불 좌우로는 보살입상이 각 1구씩 배치되어 있다. 즉 삼존불은 관음·대세지보살이협시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에 두고 과거 연등불과 미래 미륵불이 좌우로 앉은 배치를 하고 있다.


 

- 중앙 본존불은 나발의 머리에 조그마한 원형 육계가 보인다. 백호가 표현되었고 눈은 정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상호는 원만상이지만 조선시대 불상이 그러하듯 경직되어 있고 거의 무표정이다. 개금하면서 입과 턱 주위에 나선형의 수염을 표현하였다. 목에는 三道가 보이며 법의는 통견으로 어깨선을 타고 내려온 옷주름이 두껍게 처리되었으며 특히, 오른쪽 어깨를 타고 내려온 타원형의 옷주름은 조선시대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양식이다. 가슴은 양연형의 내의자락을 표현했고 그 아래로 띠 매듭을 둘렀다. 수인은 오른손은 손바닥을 아래로하여 가볍게 무릎 위에 놓은 항마인을 결하였다. 무릎은 오른발이 위로 올라가는 길상좌이며, 하체 정면에서 흘러내린 의습의 옷주름이 유려하게 흘려내려 무릎 전체를 덮고 있다.

- 왼쪽(향우) 여래상은 본존불과 비슷한 형식이지만 내의가 앙련형이 아닌 평행선으로 표현되었고, 수인은 오른손을 들어 구품인인 중품하생의 반대형을 결하고 있다. 오른쪽의 여래상(향좌)은 왼손을 들어 중품하생인을 결하고 있다.

한편, 협시 보살입상은 관음·대세지보살로 조성되어 있다. 이는 예전의 보살입상을 도난당하고 새로 조성한 보살상이다. 예전의 보살입상은 3체불과 수인만 다를뿐 비슷한 양식이었다고 한다. 협시보살상은 모두 입상으로 보관을 쓰고 있었고 문수·보현보살로 추정되며, 그렇다면 중앙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석가여래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중앙 본존부 좌우로 아미타의 중품하생인을 맺은 두여래가 있는 예는 해남 대흥사에도 있다.


 

- 불상의 조성 연대는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楞伽寺 大雄殿 釋迦牟尼佛像 服裝造 像記와 楞伽寺 大雄殿 釋迦牟尼佛像服裝記에 의해 1639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경내에 있는『능가사 사적비』음기에 대웅전 불상 화주와 별좌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의 불상이 현존하는 불상을 지칭하고 있는 것 같다. 비문에 따르면 대웅전화주는 광희 원일, 별좌는 종제 스님이다. 불상 화주는 혜영, 금화주는 신희 천일 一岑, 신개금겸 후불탱 화주는 聰演, 별좌 湛敬이다. 즉 불상을 조성하면서 개금도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 1630년대 목조불 양식을 살피는데 기본이 될만한 불상이다.(본존불 총고 184㎝, 두고 63㎝, 안고 38㎝, 안폭 38㎝, 견폭 80㎝, 무릎폭 120㎝, 무릎높이 28㎝, 좌우불 총고 107㎝, 보살상 총고 136㎝)


 

- 불화는 후불탱화와 제석천룡탱화가 1991년, 산신탱화는 1858년(철종 9), 칠성탱화는 1904년(광무 8)에 각각 조성되었다. 칠성탱화는 송광사 삼일암에 처음 봉안된 것이다.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는 사진 복사본인데, 원본은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옮겨져 보관되어 있다.


2. 응진당(應眞堂) : 조선후기(17세기 후반) 


-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막돌 주춧돌과 원통형 두리기둥 위에 외부로 2출목을 둔 3익공식 공포를 짜올렸다. 5樑 형식이나 측면은 2高柱 5樑架로 꾸몄다.

천장은 종량 위로 우물천자을 가설하였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응진당은『능가사사적비』에 따르면 17세기 후반 중창 시에 함께 지은 것으로 적고 있다.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로 중앙에 모시고 좌우로 16나한상을 배열하였다.


- 삼존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로 문수·보현보살 좌상과 아난·가섭 입상, 그리고 보살상·使者像 각 2체가 봉안되어 있다. 재료는 나무이며 개금을 하였다.

본존은 석가모니 부처님은 나발머리에 조그마한 육계가 보이며 계주도 표현하였다. 얼굴은 방형에 가까워 온화한 느낌을 주는 원만상이다.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법의는 통견이며 내의는 연화형으로 표현해 법의와 구분하였고, 띠매듭을 둘렀다. 오른발이 왼쪽 무릎 위로 올라가는 길상좌로 결과무좌하였다. 수인은 향마촉지인을 맺고 있다. 무릎 밑으로 내려처지는 의습이 사실성을 띠고 있으나 너무 주름을 많이 주어 답답한 느낌이다.


   

- 보살상은 양식이 비슷한데 아직 피지 않은 연꽃을 양손에 맞바꿔 잡고 있다. 화염무늬가 표현된 보관, 법의는 통견, 목에는 삼도가 보이며 띠매듭이나 연화형 내의자락 처리는 본존불과 유사하다. 이 삼존불은 어깨를 걸친 통견 衣文 등 그 양식이 대웅전에 봉안된 삼체불과 동일 수법임을 알 수 있다. 이 삼존불은 국가의 길흉대사가 있을 때마다 어깨와 흉부에서 땀을 흘리신다.(본존불 총고 110㎝, 두고 36㎝, 안고 20㎝, 견폭 55㎝, 무릎폭 70㎝, 무릎고 20㎝)


 

- 16나한상은 삼존불 좌우에 8구씩 모셔 놓았다. 이 불상 역시 아마 법당을 중창할 때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적비 음기에 '應眞堂 佛像十六羅漢化主 尙機 別座 萬幸'이라하여 삼존불과 16나한상을 조성한 화주와 별좌를 밝히고 있어 조성년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응진당 내의 16나한상이 바로 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틀림 없을 것 같다. 밝고 맑은 표정이며, 호랑이 등 산짐승과 날짐승을 아우르는 활달하고 힘찬 조각 솜씨가 돋보이는 걸작이다.


 

3. 천왕문(天王門;1666년) :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24


- 능가사 정문에 해당하는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어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양 협칸은 사천왕상을 모셨다. 막돌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는 외부로 2출목을 둔 공포를 올렸다. 아래쪽 쇠서의 형상이 강직하게 위로 뻗어 있어 특히 주목된다. 처마는 전·후면 홑처마이며, 양 박공면에는 風板을 달았다. 벽체는 심벽구조의 흙벽이나 중인방 아래로는 판벽으로 처리하였다.


 

- 사천왕상은 대웅전을 향하여 들어가는 오른쪽에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왼쪽에 북방 다문천왕, 서방 광목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지키고 있다.


 

- 동방 지국천왕상은 화려한 보관을 썼는데 보관 뒤로는 화염문이 조식되었다. 얼굴은 사천왕 특유의 얼굴이 사납고 위엄있는 표정이다. 왼손으로 비파를 쥐고 있으며, 오른손으로는 현을 퉁기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오른발 옆에 동자상이 있다.

 남방 증장천왕상은 화려한 보관을 썼는데 그 뒤로는 화염문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에 칼을 왼손에는 별다른 지물없이 칼 끝을 잡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상은 역시 화려한 보관을 썼으며 보관 뒤로는 화염문이 보인다. 왼손은 손바닥을 들고 뻗쳐서 보주를 쥐고 있으며 오른손은 용두화된 어류를 가볍게 쥐고 있다. 허리띠 앞으로 귀면상이 조각되어 있다.


    북방 다문천왕상은 보관을 쓰고 역시 보관 뒤로는 화염문이 조식되어 있다. 왼손은 어깨 위로 올렸으나 별다른 지물은 보이지 않고 오른손에는 긴 창을 잡고 있다.


    天王門과 사천왕상은 上樑文을 통해 1666년 중창 후 1824년과 1936년, 1995년 증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능가사사적비』의 음기에 '天王門化主 是閑 別座 懷盆 王像化主 天日 沖印 三輦化主 智雄'라는 기록이 있어 이때 참여한 화주와 별좌, 천왕문을 지을 때 사천왕상도 함께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성에 대한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는 사천왕상으로 최명희의 장편소설『혼불』에도 등장한다.(높이 약270㎝)


 

4. 강희명 동종(康熙銘 銅鍾) : 숙종 24년(1698년), 유형문화재 제69호


    대웅전 안에 있었던 것을 최근 종각을 지어 밖으로 나왔다. 종신 유곽사이 문호형 장식안에 '康熙三十七年戊寅三月日 興陽 八影山楞伽寺...'의 銘文이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龍婸는 쌍용으로 정상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음관을 두지 않고 조그마한 圓形孔으로 대신하고 있다. 용 주위에는 주조를 위한 구멍이 있다. 천판은 이중의 연화문을 彫飾하였는바 상단은 16엽 연화문이고 하단은 입상화문이다. 그 밑으로 몸통 위쪽(상대)에 원형으로 자리를 마련해 12자의 梵字文을 차례로 돌렸다.

인동문을 장식한 乳郭(27×34㎝) 안에 9개의 유두를 뚜렷하게 조출하였다. 4곳의 유곽 사이에는 천의를 걸치고 합장하고 있는 보살입상과 門戶形 장식 안에 '主上殿下壽萬歲'라는 문구가 양각되어 있다.


 


    종신의 중앙부에는『주역』에 나오는 전양인 乾(≡)에서 전음인 坤(≡≡)에 이르기까지 八卦를 양각으로 두르고 있는데 이는 조선 범종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이러한 예는 경내에 있는 능가사 사적비 귀부에도 표현되어 있어 주목된다.

8괘 아래의 명문을 통하여 주조 연대와 중창주 벽천 정현대사의 이름도 볼 수 있다. 하대에는 두줄의 띠를 둘렀고 그 안에 꽃잎과 당초무늬를 돌렸다. 특히 꽃잎은 각각 그 문양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여 정교감을 엿볼 수 있다. 종신 중앙의 주종명은 음각인데 이에 따르면 施主秩은 통정 상운 등 68인이며 공장, 조역, 연화질, 별좌, 도감·삼강 등을 밝히고 있다. 당시 주지는 道學이다. 한편『능가사 사적비』음기에 '金鐘化主雙海 重鑄別座順侃 都監前僧統義軒'라는 기록이 있다. (총고 157㎝, 종신고 117㎝, 구경 101㎝, 종신 두께 9㎝)


 

5. 사적비(事蹟碑) : 조선 숙정 16년(1690년), 유형문화재 제70호


    능가사 경내의 응진당 뒤편 남쪽에 있다. 방형에 가까운 자연석 좌대 위에 귀부를 올리고 그 위로 비신과 이수를 갖춘 완전한 형태이다. 비신 전면 상단에 篆書體 횡서로 '興陽八影山楞伽寺事蹟碑'라고 쓰여져 있고, 碑銘은 '朝鮮國全羅道興陽縣 八影山楞伽寺事蹟碑銘竝序'라고 이다.


 

    전면은 모두 19행으로 1행 63자인데 행서체로 홍문관 부제학 吳遂采(해주인)가 짓고 사헌부 대사헌 曺命敎(1687~1753년)가 전서와 함께 비문도 썼다. 말미의 '崇禎紀元後再庚午 月日立'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숙종 16년(1690)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연도는 비문을 지은 오수채나 비문의 글씨를 쓴 조명교의 활동 연대와 달라 의문이다. 그래서 혹시 '숭정기원후재경오'의 '庚午'는 '丙午'의 誤植 또는 誤讀으로 보아 비의 건립을 1726년(영조 2)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碑陰의 '我聖上卽位之己巳', 곧 '우리 임금님이 즉위하신 기사년' 가운데 '기사'는 영조가 즉위한 1725년 '乙巳'의 분명한 오식 또는 오독이므로 그 같은 주장은 더욱 설득력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오수채나 조명교의 활동 연대와도 맞을 뿐 아니라 비음에 적힌 '寺創施主秩'에 나오는 호조판서 李廷濟(1670~1737년)의 생물 연대와도 부합된다. 따라서『능가사사적비』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1690년이 아니라 그 보다 한 세대 가량 늦은 시기인 1726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능가사는 원래 보현사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지리지류에는 별개의 사찰로 각각 기록되고 있다. 초창 시기를 신라 눌지왕 원년(416) 아도화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 시기 유물이 확인되지 않으며 고구려 스님인 아도화상의 생존 연대와도 차이가 있어 확실하지 않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소실 폐찰됐으며, 이후 인조 22년(1644) 정현(號 碧川)대사가 하안거 중 신승견몽으로 광희대사와 함께 산 남쪽에 있는 옛 절터를 발견하여 전각과 요사채, 불상, 탱화, 종각, 목어각 등 불사를 일으켜 능가사를 중창하였다.


 

    정현대사의 뒤를 이어 그의 제자들인 민정과 의헌, 상기스님 등이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문과 요사체를 세우고 단청 불사를 하여 사찰 면모를 일신하였다. 중창 불사가 이루어지자 1688년 革鞭石 한 뒤 1689년 봄 스님들께서 오수채에게 글 지어줄 것을 청하여 그 이듬해 즉, 1690년에 비를 건립하였다.


 

    음기는 31행 80자인데 서문과 함께 寺璡施主秩, 前脚秩, 碑銘施主秩, 綠化秩 등을 밝히고 있다. 특히 사찰 중건에 다른 시주질은 경내 건물, 암자, 탱화, 불상, 금종 등의 화주와 별좌를 밝히고 있어 연혁과 사세, 가람 규모 파악에 도움을 준다. 음기(서문)는 숙종 15년(1689) 고흥 출신인 영해 若坦(1668~1754년)이 지은 것을 溟洲人 김사국이 썼다.


이 비를 통해 능가사는 원래 普賢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며 이 때는 소규모 암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644~1688년 사이에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다. 음기에 나타난 사찰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殿堂 : 都願堂, 大雄殿, 八相殿, 應眞堂, 靈山殿, 十王殿, 향로전, 迎請堂, 影堂, 명부전, 항적전, 신영당, 능인전, 승당, 보현전, 屹影寮, 원흥료, 語心殿, 선당, 금화전, 법운전, 청하당, 문수전, 양진당, 空柏寮, 영흥료, 관풍료, 출세료, 송월료, 도솔전, 묘적당, 汰金殿, 復鍊堂, 부도전, 환희각


 

- 門樓 : 일주문, 대루, 정문, 해탈문, 천왕문


 

- 암자 : 만경암, 비로암, 원각암, 중각암, 석문암, 수월암, 서부사암, 동부사암, 묘각암, 지장암



- 불상 : 대웅전불상, 팔상전불상, 응진당불상과 십육나한, 영산전불상, 시왕전왕상, 금강신


 

- 탱화 : 대웅전후불탱, 팔상전후불팔상탱, 응진당후불탱, 응진당중하단나한탱, 괘불삼장탱, 대제석탱, 시왕각탱



- 기타 : 대웅전 金卓依, 일주문 상장경, 염송설화판, 금종, 金袈娑靑紗長衫 비의 시주질은 嘉善 寶兼 외 99인이며 남한남단사, 경상도 곤양다솔사, 서봉사에서도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首僧은 榮性, 三浦는 證琴, 持事는 慕冠이며 書記는 發雲이다.



住持는 竺善, 都監은 前僧統 선운이다. 이 밖에 刊刻, 石工, 治匠, 供養主 등을 밝히고 있다.


- 세부양식을 보면 龜跌의 머리는 용두화되었으나 목이 짧아 웅크린 모습이다. 입안에 여의주를 머금었는데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귀부 전면에는 머리를 중심으로하여 몸통 양편에『주역』에 나오는 八卦를 새긴 독특한 문양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예는 경내 대웅전 안(현 종각)의 동종에서도 표현되고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흔하지 않는 경우다.


 

- 龜甲 하단에 6각문을 상단에는 파상문을 彫出하였는데 비늘이 말려져 올라 있는 듯이 표현되었다. 이와 유사한 예로는 조선후기에 세운 영암 도갑사의 도선 수미왕사비(1653년)의 귀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 비의 몸돌(비신)은 화강암을 매끄럽게 갈아서 만든 것으로 별다른 조식없이 篆書, 碑題, 碑銘과 序가, 陰記가 있다. 이수는 장방향으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수 하단은 전후면에 8엽의 앙련과 운룡문, 화문을 조식하였다. 상단은 두 마리의 용이 중앙의 여의주를 향해서 서로 안쪽을 보게 하였다. 네 귀퉁이에는 역시 용을 새기고 정면과 중앙에 오른편(向右) 측면에는 鬼面像을 조식하여 장식을 더하고 있다.(총고 360㎝, 비신고 290㎝, 폭 134㎝, 두께 42㎝, 字徑 4㎝)


 

6. 부도(浮屠)


- 경외 남쪽 300여m 팔영산에 오르는 길목에 추계당 부도(석종형)와 사영당 부도, 벽암선사 부도 등 9기의 부도가 있다. 또한 응진당 옆에 1기가 있다.

대부분 조선후기에 세워진 것인데, 응진당 옆 팔각원당형 부도 등 3기 외에는 전부 堂號를 알 수 있어 어느 스님의 부도인지 알 수 있다.


- 당호를 보면 18세기 초 능가사 중창에 참여한 廣熙大師 碧川堂을 비롯, 香岩堂, 碧海堂, 雲峰堂, 秋溪堂, 泗影堂의 이름이 확인된다.

특히, 추계당 부도는 용뉴와 유곽, 상대, 하대를 갖춘 완전한 범종 형태를 위하고 있어 주목된다.


 

7. 원음료(圓音寮)


- 요사채로 팔작지붕에 앞면 5칸, 옆면 3칸 건물이다. 이 밖에도 객실 2체도 있다.



1. 천학리(天鶴里)


본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구천(九天), 가학(駕鶴) 두 마을을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에 두 마을의 뒷글자를 합하여 천학리(天鶴里)로 하였고, 1980.1. 16설립된 남학초등학교가 있다.
  1) 구천(九天)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천학리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 서쪽에 거북이 형의 샘이 많아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구천(九泉) 또는 귀천(龜泉)이라 하였으며, 일정시대 귀천(龜泉)을 漢字表記가 어려워 간편하게 구천(九泉)으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절터와 서당터 : 년대 미상이나 마을 서북쪽 산중턱에 절터가 있으며, 절터 아래에는 서당터가 있어 그 형태가 남아 있다.
매  봉 : 일제시대에 한해가 들면 면민들이 매봉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다.


범바위 : 이조시대에 범바위 상봉에서 봉화를 올렸다는 구전이다.

    2) 가학(駕鶴)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천학리에 속한 마을로서 옛날 풍수가 뒷산의 지형이 학과 같다 하였으며, 마을 양쪽 산이 학이 멍애를 메고 나르는 형태라 하여 그때부터 마을 이름을 가학이라 불러왔으며 1958년 리동행정구역 변경시 분동된 이래  변개(變改)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서당터 : 마을 북쪽에 위치한 서당터가 있었으나, 지금은 저수지가 되어 형태는 찾아 볼수가 없고 서당골이라 부른다.
  2. 장남리(莊南里)

본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굴말(屈幕, 시목( 木)등의 마을을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고흥군 점암면의 장남리로 하였다.
팔영산 줄기 아래 서쪽 해창만 깊숙이 위치하며 시목과 굴막의 중간에서 천학제방에 의하여 포두면과 연결된다.
    1) 장남(莊南)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마을 앞을 흐르는 물이 맑아 "白河(백하)"라 불리어 오다가 마을 뒷산의 지형이 말의 안장과 투구봉, 노적봉, 해성봉 등이 있어 軍事陣將軍의 터로 마을이 형성되고 있으므로 군막(軍幕)이라 개칭하였다가 일정행정오기로 한때 굴막(屈幕)으로 불리어왔으나 그후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시 청장년육성에 뜻을 두고 장남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시목(木)마을

      가. 地名由來

마을 뒷산인 지형이 돼지형이며 마을의 터는 돈목(敦睦)이라 하며 형성  당시부터 당자의 땅에서 산다는 뜻이다. 그후 1800년대 마을에 감나무가 많아 시목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永幕濟(영막제) : 마을 서편에 있는 경주이씨의 제각이다.
    3) 옥천(玉泉)마을

      가. 地名由來

장현용(張現龍)이 살면서 시목에 속하는 마을로 마을앞이 간척지 공사로 답으로 조성되면서 가옥이 늘어남에 따라 해방후 1976년 점암면 9대 면장인 신윤식씨가 시목과 분리 마을이름을 옥천이라 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이 마을은 1963년전 마을앞이 바다였으나, 1963년도부터 해창만간척지 공사가 시작되여 현재는 바다가 없는 마을앞이 평야가 됐다.
  3. 강산리(江山里)

본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곡강(曲江), 오산(烏山) 두 마을을 합하여 1914년 이후 행정구역 개편시에 두 마을의 뒷글자를 합하여 고흥군 점암면의 강산리(江山里)로 하였다.

팔영산(八影山) 북쪽 해안에 위치하여 여순(麗順)반란사건과 6.25사변시 공비잔당들이 팔영산에 은거하여 피해가 많앗다. 이곳에 강산폭포가 있고 1971.3.2에 설립된 강산초등학교가 있다.
    1) 곡강(曲江)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강산리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앞이 바다로서 浦口로 형성되여 일명"갈개"라고 불리어오다가 마을앞 강이 구비돌아 흐른다는 뜻으로 유래되여 곡강이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백일장(百日場)터 : 마을 남쪽에 위치한 강산폭포 아래에서 활쏘는 터가 있으며 조선조시대에 이곳에서 백일장을 열었다는 터가 남아 있다.
    2) 신흥(新興)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곡강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앞이 바다인데(지금은 간척지 공사로 평야가 됨) 마을이 포구(浦口)로 형성되여 古今浦(일명:고부개)라 불리어 오다가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시 곡강마을 서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하여 신흥으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독다리(돌다리) : 마을 남쪽에 위치한 다리(길이 4m, 넓이 3m)로서 돌 하나로 다리를 놓았다하여 독다리라고 이름했다.
    3) 오산(烏山)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강산에서 분동(分洞)마을로서 당초 마을명을 "까막제"라고 불러왔는데 까마귀산이 있고 그곳에 고개(재)가 있으므로 까막재라 하다가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까마귀산으로 한자로 표기하여 오산(烏山)이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4. 여호리(呂湖里)

본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마을의 지형이 여(呂)자 형으로 생겼고, 풍수지리상 연화부수(蓮花浮水)형의 지형이므로 여도(呂島), 방내(芳內)등의 마을을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에 고흥군 점암면의 여호리(呂湖里)로 하였다.

바다건너 과제방축조사업이 활발하여 북쪽의 계도(溪島), 우모도(牛毛島)를 연결하는 제방과 남쪽의 명주도(明珠島), 강산리(江山里)를 연결하는 제방이 남북으로 뻗어 있다.

특히, 여도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보성군에 속한 여도진이 설치되어 수군만호 (水軍萬戶)가 있어 중선 6척, 맹선 12척과 조사 1,012명, 뱃사공 19명을 거느렸고 후에는 점암면 금사리에 설치된 전라좌수영 사도진첨절제사(蛇渡鎭僉節制使)의 관할에 속한 요충지였다.

영조때의 기록에는 흥양현 동쪽 59리에 있고, 성의  주위가 1,100척, 높이 12척, 치첩(雉堞)이 44이고 남문과 북문이 있었으며 여도진지도의 기록에는 성의 넓이가 동서 10리, 남북 7리에 전선(戰線) 1척(탑승  防軍) 810명이었으며 성밑 거리에는 민가가 166호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현재의 마을보다 규모가 훨씬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과역면 원주도가 여도만호진에 속하였으며 이곳에서 사도까지는 육로 20리이고, 전라좌수영까지는 육로 180리, 수로 100리라고 하였다.
여호리 150번지의 오목하게 파인곳이 당시의 선소(船所)로서 굴강터의 흔적으로 추측된다. 마을에 여도만호의 선정불망비(善政不忘碑) 4기가 있고 1970. 3. 1에 설립된 여주초등학교가 있다.
    1) 여호(呂湖)마을

      가. 地名由來

마을의 지형이 여(呂)자형으로 생겼고 반도(半島)에 위치하므로 풍수지리상 연화부수(蓮花浮水)라 하여 마치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것에 비유하여 여도(呂島)라 불러 오다가 1914년대에 마을이름을 여호(呂湖)라 개칭한 이래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우모도(牛毛島) : 섬의 지형이 소꼬리 털에 해당된다는 뜻에서 우모도(牛毛島)라 하며, 지금은 제방으로 인하여 닭섬과 함께 육지로 연결됐다.
    2) 방내(芳內)마을

      가. 地名由來

마을앞에 있는 산이 바가지(박)와 같이 생겼으므로 박내라고 부르다가 그 박의 향기로 둘러쌓인 마을이라는 뜻에서 음차하여 방내(防內)라 한다.
      나. 特記事項

군막(軍幕) 및 깃대방 : 마을 동쪽으로 1㎞ 떨어진 지점에 선조 1592년 임란때 수천명의 군사를 주둔시켰던 곳으로 군막(일면 굴막)이라 하였으며 군막과 연결된 높은 곳(해발 200m 높이)에 국기를 세웠던 국기대 받침이 지금도 남아 있어 이곳을 "깃대방 꼭대기"라고 부른다.
신선봉(神仙峰) : 마을 앞 산을 안산(案山)이라고 하는데 산봉우리에서 옛날 신선이 놀았다는 신선봉(神仙峰)이 있다.
  5. 화계리(花鷄里)

본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화전(花田), 당치(堂峙)등의 여러마을을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고흥군 점암면의 화계리(花鷄里)로 하였다.
점암면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과역면과 접하며 김녕김(金寧金)씨의 성이 많다.
이곳에 1939. 4 .19분교로 설립되어 1943년에 승격한 화계초등학교가 있다.
    1) 화전(花田)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화계리(花鷄里)에 속하며 마을의 뒷산이 연화산(峰)(連和山)이므로 마을 앞으로 흐르는 하천이 있어 당초에는 화계리(花鷄里)라 불리어 오다가 1914년 일제초기에 행정구역개편 당시 마을이 연꽃밭(섶밭)이라는 뜻에서 화전(花田)으로 개칭하여 변개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장군바위 : 마을 동쪽에 있는데 조선조때 정박할 때 장군들이 이곳에 은거한 장군바위가 있다.
瓦野谷(와야곡) : 마을 동쪽 산골짜기에서 기와를 구워 생산했다.
    2) 예동(禮洞)마을

      가. 地名由來

옛날 배가 닿는 곳에서 고개를 넘는 지점에 마을이 형성됐다하여 마을 이름을 한때 "배월금"이라 불리어 오다가 마을앞에 대룡나무가 많아 대룡나무의 꽃을 비유하여 예동이라 하였으나, 1956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화계리에서 분리되면서 예의를 숭상하는 뜻으로 예동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벼늘터 : 가을에 추수하여 벼를 쌓아 놓는 곳이라 하여 벼늘터라 한다.
    3) 신전(新田)마을

      가. 地名由來

1952년에 신전저수지가 방조되면서부터 아랫동네가 살기좋은 곳이라하여 새점이 신점으로 다시 신점으로 다시 신전마을로 일구었다하여 개칭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터    골 : 소지명인 터굴서는 7호까지 거주하였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아랫동네로 이가하여 현재는 일호도 없음.
아랫동네 : 1952년 신전제가 방조되면서 홍수위험으로 안전지대인 위머리로 이주하여 살고 있음.
뉘 머 리 : 웃동네는 처음 5호밖에 없었으나, 저수지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지금은 중앙지가 뉘머리가 되면서 살고 있음.
    4) 당치(堂峙)마을

      가. 地名由來

본래는 점암면 沙洞里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 뒷산의 지형이 돼지형이며 마을의 터는 돼지 구유형으로 되어 잇고 산허리 지점에 당이 있어 마을명을 당치라 불리어 왔는데 1914년 일제초기에 행정구역개편시 점암면 화계리 당치로 이전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당치(堂峙) : 마을 뒷산 고개에 당이 있어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액운을 쫓는다하여 돌을 던져 쌓인 돌무덕이가 있었으나 지금은 도로확장공사로 흔적을 볼 수가 없다.
  6. 성기리(聖基里)

본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성주(聖柱), 두지(斗地), 한산(閑山)등의 마을을 합하여 1914년 이후 행정구역 폐합시에 고흥군 점암면의 성기로 하였다.

강산리, 양사리와 함께 팔영산 아랫마을로 북쪽에 위치하며 유명한 능가사가 있고, 이곳에 조선시대 점암면의 사창(社倉)이 있었으며 석도(石刀)가 발굴되었다.
    1) 성주(聖柱)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성기리에 속하며 옛날 마을뒤에 성주골 샘이라는 우물이 있고 마을이 팔영산(八影山) 모이봉(茅二峰)과 상접하므로 한 때 성주동(聖主洞)이라  하였으나, 성주는 성상을 뜻하는데 村名에 붙이는 것은 성상을 모독한다하여 성주로 개칭한 후 변개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두지(斗地)마을

      가. 地名由來

본래 성기리에서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분동된 마을로서 조선조시대에 점암면의 사창(社倉)이 있던 곳인데 쌀을 말(斗)로 되어서 출하하였다하여 마을명을 두지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평촌(平村)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성주동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뒤에 봉바위가 있어 한때 "봉암"이라 불리어 왔으나 능가사 앞들이 평지로 조성됨에 따라 1956년 리동행정구역 변경시 평촌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4) 한산(閑山)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성기리에 속하며 마을 뒷산에 童子峰이 잇어 마을명을 "동자동(童子洞)"이라 하였고 또 옛날 이곳에 인근지역의 시장이 열렸으므로 "장터거리"라 불리아 왔으나 1914년 일제초기에 행정구역개폐시 마을뒷산의 이름이 한산(閑山)이므로 산명을 따서 한산이라 개칭한 후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율촌(栗村) : 마을내에 밤나무가 많아 설촌당시 율촌이라 불렀다.
    5) 한동(閑洞)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성기리에 속하며 마을 뒷산에 한산동(閑山洞)이라 부르다가 마을 옆에 시장이 열렸으므로 "장터거리"라 불리어 왔으나 일제말에 다시 동자동(童子洞)으로 분리되었다가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시 한동으로 개칭한 후 변개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7. 모룡리(茅龍里)

본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모동(茅洞), 회룡(回龍)등의 마을을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에 모동, 회룡 두마을의 앞뒷글자를 합하여 고흥군 점암면의  모룡리라 하였다.

점암면 소재지로 1918년에 용두리(龍頭里)에서 면 소재지를 이곳으로 옮기고 옛 사도진영의 객사(客舍)를 헐어 면사무소로 개축하였다.

김녕김(金寧金)씨가 많으며, 1971. 1. 15에 설립된 고흥점암중학교와 1930. 5. 29 초등학교로 성기리에서 설립된 보통학교가 1938년에 면 소재지로 옮긴 점암초등학교가 있다.
    1) 상촌(上村)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모룡리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북쪽의 靑龍嶝(龍山뒷산)이 돌아다 본다하여 설촌시부터 "회룡동(回龍洞)"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폐합시 모룡리로 합병되었으나 1956년 리동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모룡리의 가장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촌으로 분동된 후 변개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당  재 : 마을 남쪽에 있는 고개로 임진왜란 이후 무기대용으로 돌을 고개등에 비축한 것이 돌로 쌓인 담으로 변하여 당재라 부른다.
장군지(將軍池) : 마을 북쪽 구 보건소 아래 못이 있어 옛날 장군이 그물을 마시었다하여 장군지라 했는데 경리정리로 없어졌다.
    2) 용산(龍山)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모룡리에 속한 마을로서 모룡리의 아랫마을이라는 뜻으로 아릿� 또는 하촌(下村)이라 불리어 왔으며 마을의 지형이 풍수지리상 회룡고조이라하여 마을명을 "面龍洞(면용동)"으로 부르다가 마을뒤에 용산이 있어 1959년 리동행정구역 변경시 용산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느티나무 : 약 310년전 入鄕組(입향조)가 심은 느티나무가 마을회관 옆에 있다.
    3) 회계(回溪)마을

      가. 地名由來

원래 面龍洞(면용동)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입구에 바위로 만든 다리가 있어 "바구다리"라고 불렀으며 마을의 산세가 회룡고조형국(回龍顧祖形局)이므로 面龍洞(면용동)이라 하였으나 1914년 일제초기 행정구역 폐합시 시냇가의 맑은 물이 마을을 곱게 둘러쌓여 흐른다는 뜻으로 회계라 개칭하고 변개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 特記事項

장성거리 : 마을 남쪽에 있는 고개인데 그곳 지형이 중의 장삼과 같이 생겼다하여 장성거리 또는 그 곳에 장성이 있었다하여 장성거리라고 하였다.
까 치 골 : 마을 남쪽의 산골짜기 끝에 까치가 살았다하여 부르고 있다.
    4) 모동(茅洞)마을

      가. 地名由來

지형이 관복의 띠와 같다고 해서 띠골이라고 했으나, 외정때 띠자를 잘못해석 풀의 띠로 해석 띠모라고 하여 띠골 즉 모동이라고 하였다.
      나. 特記事項

마을 앞산에 중바위가 우뚝솟아 있는데 지금부터 약 40년전 마을 어른들께서 힘을 겨루기 위해 중바위 머리를 밀어 약 200m 산 아래로 굴러 내렸다.그 후 마을이 흉난이 겹쳐 다시 중머리를 올린 후 별다른 사고없이 마을이 평화로웠다는 전설이 있다.
노점동 ; 옛 선인들이 살면서 옹기굽던 터로 그 흔적과 집터가 남아 있다.
  8. 대룡리(大龍里)

본래 흥양군 점암면의 지역으로 대촌(大村), 오리(梧里), 용두(龍頭)등의 마을을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대촌과 용두의 머릿자를 합하여 대룡리(大龍里)로 하였다.1918년까지 점암면사무소가 있었으며 1920년대에 설치된 점암파출소가 있고  고령신(高靈申)씨의 성이 많다.
    1) 대춘(大春)마을

      가. 地名由來

2009/08/16 23:07 2009/08/16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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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군 점암면 화계리 화전 - 김영삼 시골집

갑자기 시골이 그립다.
2009/08/16 23:02 2009/08/1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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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5 11:36 2009/08/05 11:36
사람들이 흔히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대비해서 말하지만, 체계의 규모로 봤을 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같은 급으로 놓기는 어렵습니다. 공산주의는 정치, 경제 이론을 중심으로 예술, 도덕 이론을 포함하고, 종교적인 성격까지 갖추었기에 근대에 들어 인간이 만들어낸 이념 중에선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자본주의는 단지 경제이론이 중심이고, 경제를 넘어선 부분에 대해선 별로 제공할 이론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는 예술가가 어떤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정교한 공산주의 예술이론을 개발했는데, 자본주의는 예술가, 특히 순수 예술가에게 이러한 지침을 제공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공산주의 사회에 살던 예술가들은 공산주의의 표현으로 예술을 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예술가들은 자본주의와 별로 상관이 없는 예술 활동을 벌이기 마련이죠.

정치의 영역을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공산주의는 정치와 경제를 긴밀한 관계로 보고, 따라서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서 일관된 이념을 제시합니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노동자가 경제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노동자를 대표하는 노동당이 정치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지요. 그에 비해 자본주의는 정치의 영역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만약 자본주의를 정치에 적용한다면 자본가가 경제의 중심이기 때문에 자본가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자본주의를 따르는 국가는 대부분 정치권력을 일반 국민에게 돌리는 민주주의를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민주주의 체제는 "경제권력은 자본가가, 정치권력은 일반 국민이 갖는" 기묘한 구조라고 할 수 있죠.

자본주의가 이처럼 경제의 영역만 다루는 규모가 작은 이념이기에, 자본주의를 사회에 받아들이려면 자본주의 만으로는 안 되고 이를 보충하는 다른 이념이 필요합니다. 유럽은 기독교 전통과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보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논리를 따르자면 노동자에게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월급을 주면 됩니다. 즉,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이 많다면 노동의 공급이 많은 셈이니 노동의 가격이 내려가고, 따라서 매우 적은 월급만 주고 일을 시켜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 농촌이 몰락하면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이 늘면서 노동시장은 포화 상태가 되었고, 자본가들은 이들에게 생계를 유지하는데도 부족한 월급만 주고 험한 일을 시켰습니다. 수입이 적어 생계가 어려워진 노동자들은 아이들을 노동 시장으로 내몰았고, 이로 말미암아 어른보다도 더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일하는 아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알려지면서 때문에 "존엄한 인간을 이렇게 대해선 안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정치인에게 압력으로 작용해 노동환경 개선, 아동 노동 금지, 최저 임금제 등의 결실을 보았습니다. 만약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보는 전통이 없었다면, 그리고 이러한 민심의 흐름을 정치권력으로 바꾸어 놓을 정치 제도가 없었다면 지금도 유럽에선 기름 범벅이 된 꼬마 아이들이 공장에서 큰 기계 틈으로 다니며 위험한 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전통적인 자본주의는 윤리의 영역에 대해 제공할 이론이 없지만, 20세기 들어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윤리학을 건설하는 야심 찬 작업을 추진하던 사람이 있습니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인 아인 랜드(Ayn Rand)가 바로 그 사람인데, 그녀는 아틀라스(Atlas Shrugged) 등의 소설을 썼을 뿐 아니라 객관주의(Objectivism)라는 철학을 주창하기도 했습니다. 랜드는 자본주의- 알려지지 않은 이상(Capitalism: The Unknown Ideal)을 쓴 데서 알 수 있듯, 자본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우파였습니다. 그가 쓴 이기심이라는 덕목(Virtue of Selfishness)은 그가 생각하는 윤리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 랜드는 각 사람은 행복해지려고 태어났고, 따라서 개인의 행복 추구는 최고선이기에,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놓는 태도야말로 미덕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남에 대한 배려나 불쌍한 사람에 대한 동정 등은 자신의 행복을 방해하는 악덕이고, 배척해야 마땅하죠. 그런데 랜드가 옹호하는 태도는 바로 "우리가 낸 세금으로 왜 가난한 자를 돕느냐?"고 항변하는 부자들의 태도와 일치합니다. 즉, 부자에 대한 감세 정책은 미국에서건 한국에서건 랜드의 윤리관을 따르자면 대단히 도덕적인 정책입니다. 그에 비해 돈 많은 사람에게 세금 걷어 가난한 사람을 돕는 정부는 랜드에 따르자면 대단히 부도덕하다고 할 수 있죠.

"이기심이 곧 덕목이다."는 아인 랜드의 주장이 단지 한 궤변가의 헛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아인 랜드의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그의 말을 쉽게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우선, 지금도 영어권 국가에서는 랜드가 쓴 Fountainhead나 Atlas Shrugged가 많이 팔립니다. 이러한 책들은 단지 소설이 아니라 랜드의 사상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통로라는 점에서 랜드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다고 할 수 있죠. 또한, FRB 의장을 지낸 앨런 그린스펀이 랜드가 이끌던 Objectivism 그룹에서 열심히 활동했고, 그의 열렬한 추종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그는 랜드의 "자본주의- 알려지지 않은 이상"에 한 챕터를 쓰기도 했죠), 랜드의 사상이 그린스펀 등의 고위 관료를 통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추측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자본주의는 다른 이념이나 종교에서 윤리관을 빌려와야 하는데, 다른 이념이나 종교가 대부분 쇠퇴한 오늘날 자본주의는 약육강식의 법칙이라는 자신 내부의 논리를 윤리로 발전시키려 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전통적인 개념의 윤리는 무너져 버리고, 사회는 오직 욕심이 가득 찬 인간들이 무한투쟁을 벌이는 전쟁터로 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막으려면 자본주의가 윤리의 영역에 침범하지 못하게 제한해야 합니다. 즉, 자본주의에 대한 견제가 필요한 것이죠.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고 이기심을 덕목으로 치켜세운다면 진정한 윤리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2009/08/01 09:57 2009/08/01 09:57

그대는 '깨어 있는' 만큼 '존재한다'.


좀 더 밝게 존재하고 싶다면 좀 더 깨어 있으라.


깨어 있음 속에서 존재가 나온다.


깨어 있지 못한 만큼, 그대의 존재는 사라진다.


그대가 만취했을 때를 생각해 보라.


거기에 그대의 존재는 없다.


잠잘 때도 그대는 거기 없다.


이를 지켜본 적이 있는가? 깨어 있게 될 때 그대는 변화한다.


그대는 존재의 중심 속에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확실하게 느껴진다.


거의 만져질 듯이 느껴진다.


무의식 속에서 잠을 자거나 깨어 있지 못하면 존재의 느낌은 줄어든다.


즉 존재의 느낌은 깨어 있음과 비례하는 것이다.


<오쇼 라즈니쉬, 위대한 만남>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 절에 가는가? 왜 교회에 가는가?


그때그때 스스로 물어서 어떤 의지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삶이 개선됩니다.


삶을 개선하지 않고 종교적인 행사에만 참여한다고 해서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무엇 때문에 내가 절에 나가는가, 무엇 때문에 내가 교회에 나가는가 그때그때 냉엄하게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적인 타성에 젖어서 신앙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어리석은 짓을 할 수가 있습니다.


<법정스님, 일기일회>

2009/07/30 09:56 2009/07/30 09:56

시간단위마다 의도하기란


자신의 의도가 바뀌는 순간, 새로운 시간단위에 들어섭니다.

즉, 설거지를 하고 있는 중에 전화벨이 울리면, 새로운 시간단위에 들어선것입니다.

차에 올라타면, 새로운 시간단위에 들어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방에 들어오면 새로운 시간단위에 들어선것입니다.

시간의 새로운 단위안으로 들어가기전에 자신이 기대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시간단위에 그냥 들어가서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어떤 것을 관찰하기 시작하는 것보다,

그 시간단위의 경향을 자신이 의도하는 특정한 방향으로 바꿀수 있게 될것입니다.


좀더, 예를 들면

아침에 잠자리에서 눈을 뜰때 새로운 시간단위에 들어선것입니다.

이때 "오늘은 더욱 활기차고 열정적인 하루를 보내게 되면 좋겠다" 의도합니다.


출근해서 회사문에 들어서기 전에 새로운 시간단위에 들어선것입니다.

이때  "동료들과 즐겁고 보람있게 일을 하겠다." 의도합니다.

다른 사람을 고양시키는 사람인 동시에 언제나 웃을 준비가 되어있는 자신을 상상합니다.


전화벨이 울립니다. 새로운 시간단위에 들어선것입니다.

수화기를 집어들고 누가 전화했는지를 확인하는 동시에, 대화를 나누기 전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명확한 의도를 세웁니다.


잠자리에 들어갈때 새로운 시간단위에 들어선것입니다.

이때 충만한 휴식을 줄 잠에 대한 의도를 합니다. 육체기관들이 원기를 회복할것이고, 다음날 상쾌한 기분으로

깨어나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새로운 시간단위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내 의도로 미래에 길을 내는 것입니다.


어떤일이 잘 안될때, 그 일이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만들고 싶을때 시간단위마다 의도하기를 사용하면 효과적입니다.

이미 지배적인 어떤 생각을 바꾸려고 하는 것 보다는, 미약하지만 새로운 생각에 집중하여 그것을 크게 만드는 것이 보다 쉽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현재 체험하고 있는 현실을 바꾸는 것보다, 

내가 바라는 미래에 집중하여 새롭게 창조하는게 훨씬 더 쉽다는 겁니다.


이것이 시간단위별 의도하기의 힘입니다.


처음엔 시간단위를 빨리 알아차리는 것이 쉽진 않을것입니다.

하루하루 시간단위 알아차림의 연습을 통해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있을때, 자신의 의도가 만들어낸 힘과 운동량을 느끼게 될것입니다.

즉, 자신이 영광스러울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라는 느낌을 가질것이며,

또한 자신이 스스로의 삶 체험을 창조적으로 통제하고 있는모습을 반복해서 보게 됨에 따라,

자신이 될수 없고, 할수 없고, 가질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행복창조의 비밀 - 시간단위별 의도하기 중에서 >

2009/07/30 09:55 2009/07/30 09:55
 
1285. 고흥현(高興縣)이라 칭함.
1395. 현(縣)을 폐지하고 보성군 조양현에 속하게 하고 진(鎭)을 설치함.
1441. 조선 세종대왕때 장흥부의 두원현과 도양현을 설치 보성군 남양현을 편입하고 흥양현이라 개칭함.
1914. 3. 1. 부군 폐합에 따라 고흥군(高興郡)이 됨. (13면)
1973. 7. 1. 도양면이 도양읍으로 승격(1읍 12면 3출장소)
1973. 7. 1. 도양읍 도덕출장소 설치
1974. 4. 4. 도양읍 소록도에 소록출장소 설치
1979. 5. 1. 고흥면이 읍으로 승격(2읍 11면 5출장소)
1983. 2. 15. 도양읍 도덕출장소를 도덕면으로 승격(2읍 12면 4출장소)
1983. 2. 5. 금산면 오천리에 오천출장소가 설치
1986. 3. 27. 점암면 양사출장소가 산내면으로 승격(2읍 14면 3출장소)
1989. 4. 1. 산내면을 영남면으로 명칭 변경
1990. 7. 1. 봉래면 내도출장소를 동일면으로 승격(2읍 14면 4출장소)
1990. 7. 19. 포두면 송산리 송산출장소 설치(2읍 14면 4출장소)
1999. 1. 14. 포두면 송산리 송산출장소 및 금산면 오천출장소폐지(2읍 14면 2출장소)
2001. 4. 28. 우주센터 지원사업소 설치(2001. 4. 28 公布)
2002. 9. 23. 자치지원과 설치(2002. 9. 23 公布)
2009/07/23 13:42 2009/07/23 13:42

2009. 6. 30 현재 (단위 : 명/세대)

행정기관 인 구 세 대 수 세대당인구 65세 이상
인구수
75,663 36,568 39,095 35,068 2.16 23,514
고 흥 읍 12,777 6,205 6,572 5,130 2.49 2,052
도 양 읍 11,051 5,433 5,618 4,710 2.35 2,375
도양(소록출) 800 414 386 630 1.27 479
도양(시산출) 266 142 124 123 2.16 86
풍 양 면 4,051 1,955 2,096 1,963 2.06 1,499
도 덕 면 3,624 1,719 1,905 1,768 2.05 1,445
금 산 면 5,260 2,630 2,630 2,519 2.09 1,771
도 화 면 4,934 2,364 2,570 2,338 2.11 1,688
포 두 면 6,098 2,940 3,158 2,888 2.11 2,173
봉 래 면 2,360 1,163 1,197 1,177 2.01 816
동 일 면 1,823 901 922 860 2.12 589
점 암 면 3,285 1,533 1,752 1,685 1.95 1,335
영 남 면 1,668 778 890 829 2.01 645
과 역 면 4,219 1,988 2,231 2,021 2.09 1,401
남 양 면 2,870 1,331 1,539 1,369 2.10 1,083
동 강 면 3,884 1,897 1,987 1,763 2.20 1,318
대 서 면 2,927 1,419 1,508 1,432 2.04 1,116
두 원 면 3,766 1,756 2,010 1,863 2.02 1,643
2009/07/23 13:41 2009/07/23 1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