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공기업 최고경영자(CEO) 물갈이 작업이 본격화하고 있다. 현재 정부가 통제·관리할 수 있는 공기업과 공공기관은 총 305개다. 이 중 지금까지 100여 곳의 공기업 CEO가 사표를 냈거나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각 부처는 산하 공기업의 CEO를 대상으로 이달 말까지 사표를 받을 계획이다. 이어 5월 중순까지 재신임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5월 중순 이후 CEO의 사표가 수리된 공기업부터 공모 절차를 밟아 새 CEO를 선임하게 된다. 토지공사는 속도를 높여 29일 이사회를 열어 임원 추천위원회를 구성할 계획이다.

한성대 박영범 교수는 “공기업도 크게는 정부의 일부로 볼 수 있어 정권이 바뀌면 새로운 통치철학을 구현하는 차원에서라도 공기업 간부의 인사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의 기본 철학은 ‘작은 정부’와 ‘경쟁과 효율’이다. 공기업은 그동안 이런 철학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지적이다. 새 정부 들어 “공기업 CEO 교체 폭이 사상 최대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공기업 경영을 확실히 뜯어고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공기업 CEO 줄사표=교육과학기술부 산하 2개 과학계 기관장의 사표가 24일 수리됐다. 최석식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이승구 과학기술인공제회 이사장이 그들이다. 유희열 기초기술이사회 이사장도 사표를 내 수리 절차가 진행 중이다. 13개 이공계 정부출연구원장들도 이날 일괄 사표를 냈다.

이에 앞서 18일 주택공사 박세흠 사장, 토지공사 김재현 사장, 수자원공사 곽결호 사장의 사표가 수리됐다. 국내 최대 공기업인 한국전력의 이원걸 사장을 비롯해 지식경제부 산하 공기업 사장들은 대부분 사의를 표명했다. 산업은행 김창록 총재, 우리금융지주 박병원 회장 등 금융 공기업의 수장들도 일제히 사표를 냈다. 이들을 대상으로 정부는 선별적으로 재신임하겠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공기업 CEO의 재신임 여부를 어떤 기준을 갖고 정할지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다. 현재로선 경쟁과 효율에 익숙한 민간인을 공기업의 새 CEO로 많이 영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금융 공기업 기관장과 감사들이 다 사표를 제출했다”며 “경영 능력과 전문성, 재임 기간, 새 정부의 국정철학과 맞는지 등을 감안해 관계 당국과 협의를 거쳐 최대한 빨리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CEO에 관료 출신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며 “다만 능력 있는 민간인이 많이 CEO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은 “여러 기관에서 검토해 우수한 사람은 유임될 수도 있지만, 어떤 원칙이나 처리 시한은 없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도 “공기업 CEO 교체와 관련해 정해진 원칙은 없다”고 말했다.

◇“선임 절차 투명해야”=공기업 CEO를 차지하기 위해 각종 줄을 대는 사람이 늘고 있다. 서강대 국제대학원 허윤 교수는 “능력 있는 인재를 공기업으로 영입한다는 원칙이 섰으면 선임 절차를 투명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기업 CEO는 사외이사와 이사회에서 임명한 전문가로 구성된 ‘임원 추천위원회’의 심사와 추천을 거쳐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동안 이런 절차에도 불구하고 정치권 출신 인사나 관료들이 공기업 CEO로 임명된 것은 임원추천위 구성과 운영이 투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숭실대 오철호 교수는 “공기업 CEO 선임 때 잡음이 발생한 것은 제도상의 문제가 아니라 추천위의 독립성을 확실히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추천위원들이 자신을 임명한 공기업 사장이나 이사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그는 “전문성이나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인사를 과거처럼 ‘밥그릇 챙겨 주기’ 식으로 내려 보내면 새 정부도 공기업 개혁은 손도 써 보지 못하고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종윤·손해용 기자

외국선 공기업 인사 어떻게
프랑스, 무능력자 추천하면 이사회서 거부
미국선 정부가 임명하지만 결격 땐 옷 벗어


선진국에서도 공기업 사장은 정부가 임명한다. 정권이 바뀌면 대규모 물갈이가 있기도 한다. 그러나 철저한 검증과 투명한 선임 절차가 있어 사장 선임을 둘러싼 잡음은 찾아보기 어렵다.

프랑스는 각 공기업의 이사회가 주축이 돼 사장을 뽑는다. 중소 규모 공기업 사장은 정부 간섭 없이 각 기업의 이사회가 자율적으로 선임한다. 규모가 큰 철도공사(SNCF)와 전기공사(EDF)는 정부가 사장을 정해 추천한다.

능력 있는 전문가를 선별하기 때문에 시민단체가 비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만약 무능력하거나 문제가 있는 인물을 정부가 추천하면 이사회가 끝까지 승인을 거부할 수 있다. 이사회에 시민단체 관계자 등을 참여시켜 내부 감시 기능을 하도록 한 곳도 있다.

영국은 공공법인의 임원은 공모를 통해 선출한다. 공공 임용 위원회가 별도로 설치돼 임원 임용의 전 과정과 자격을 검증한다.

미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규모 인사가 있다. 장관 이하 3600여 개 자리의 임면권을 대통령이 쥐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이 자기 사람을 챙기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권력에 가까운 인사라도 공기업 사장을 하는 데 결격 사유가 생기면 바로 물러나고, 정권의 운명에 따라 깨끗이 옷을 벗는 것도 제도처럼 굳어져 있다. 특히 한국처럼 정권 말기에 자기 사람을 챙기기 위해 공기업 감사나 임원을 새로 선임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뜻의 ‘아마쿠다리(天下り)’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때 낙하산 인사가 문제가 됐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고위 공무원이 산하기관에 재취업해 산하기관 임원직을 차지하는 것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는 공기업과 산하 단체의 이사장과 감사직을 무조건 공모로 뽑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는 정부 산하기관 163개 중 136개를 폐지하거나 민영화시켜 15조원의 재정을 절감하기도 했다.

김영훈 기자
2008/06/26 00:22 2008/06/26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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